중국열전/한유

한문공본전(당송팔가문초)

황성 2008. 5. 24. 12:19
 

한문공본전


 한유(韓愈)의 자는 퇴지(退之) 등주(鄧州) 남양(南陽) 사람이다. 7대조 한무(韓茂)는 후위(後魏)에 공로가 있어서 안정왕(安定王)에 봉해졌다. 아버지 한중경(韓仲卿)은 무창(武昌)의 수령이 되어 아름다운 정사를 펼쳤고, 이미 떠남에 고을 사람들이 돌에 새겨서 덕을 칭송하였고, 벼슬은 비서랑(秘書郞)으로 마쳤다. 한유는 태어난 지 세 살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어 백형인 한회(韓會)가 폄직되어 영표(嶺表)에서 관직 생활하는 곳을 따라갔다. 한회가 죽음에 형수인 정씨(鄭氏)가 양육하였다.

 한유는 스스로 독서할 줄을 알아 날마다 수 천 말을 기억하였으며, 장성함에 미쳐서 육경과 백가의 학문에 능통하였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마침 동진(董晉)이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가 됨에 표를 올려 관찰추관(觀察推官)에 임명하였다. 동진이 죽음에 한유가 상여를 따라 나감에 4일이 되지 않아서 변군(汴軍)이 난리를 일으키니 곧 떠나서 무녕절도사(武寧節度使) 장건봉(張建封)에게 의지하였는데, 장건봉이 부추관(府推官)에 불렀다. 한유는 조행이 굳고 발랐으며 곧은 말을 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사문박사(四門博士)을 맡았으며,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옮겼는데, 소를 올려 궁시(宮市)에 대해서 지극히 논하니, 덕중이 화를 내어 양산령(陽山令)으로 폄직시켰다. 백성들을 아끼니, 백성들이 자식을 낳음에 많이 그의 성으로 이름을 삼았다. 강릉법조참군(江陵法曹參軍)으로 고쳤다. 원화(元和) 초에 임시를 국자박사를 맡아 동도의 분사(分司)가 되었으며, 3년 뒤에 국자박사가 되었다. 도관(都官)원외랑(員外郞)으로 고쳤으며, 곧 하남령(河南令)에 배수되었고, 돌아와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으로 옮겼다. 화음령(華陰令) 류간(柳澗)이 죄가 있었는데, 전 자사가 탄핵을 하였으나, 답보가 내려오지 않고 자사가 파직되니, 류간이 백성을 선동하여 막고서 군이 주둔하며 부린 부역의 값을 요구하였다. 후 자사가 미워하여 그 옥사를 살펴서 류간을 방주사마(房州司馬)로 폄직시켰는데, 한유가 화음지방을 지나다가 자사가 몰래 서로 당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소를 올려 다스리게 하였다. 이미 어사가 신문함에 간의 물증을 얻고 다시 봉계위(封溪尉)로 폄직시켰다. 한유가 이것에 연좌되어 다시 박사(博士)가 되었다. 이미 재주가 높으나 자주 출척을 당하였고, 관직이 또 아래로 좌천(左遷)되니 곧 진학해(進學解)를 지어서 스스로를 비유하였다. 집정(執政)이 열람을 하고서는 그의 재주를 특별하게 생각하여 비부랑중사관수찬(比部郞中史館修撰)으로 고쳤고 고공지제고(考功知制誥)에 전임되었고,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진급하였다.

 초에 헌종이 장차 채주(蔡州)를 평정하려 함에 어서중승 배도(裵度)에게 명령하여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안시(按視)하게 하였는데, 돌아옴에 미쳐서 갖추어 말하기를 “적은 섬멸할 수 있다.”고 하니, 재상과 더불어 의논함에 합치하지 않았다. 한유가 또한 아뢰어 말하기를 “회서(淮西)는 몇 해 동안 침략하여 스스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니, 그들이 패함을 서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은 폐하가 결단함과 결단하지 않음에 달려있을 따름입니다.”라고 하니, 집정이 좋아하지 않았다. 마침 어떤 사람이 비방을 하되, “한유는 강릉에 있을 적에 배균(裵均)이 후사를 하였다. 균의 아들 배악(裵鍔)이 평소 행적이 없었는데, 한유가 문장을 지어서 자를 배악에게 명령하였다.”하니, 비방의 말이 시끄러웠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로 고쳤다. 배도가 재상절도창의군(宰相節度彰義軍)으로 회서를 선위(宣慰)함에 미쳐서 한유에게 행군사마(行軍司馬)를 아뢰고, 한유가 수레를 타고 갑자기 먼저 변주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한홍(韓弘)에게 유세하여 하여금 협력하게 하니 오원제(吳元濟)가 평정되었다. 이 공로로 형부시랑으로 옮겼다.

 헌종이 사신을 보내어 봉상에 가서 불골을 맞이하여 궁중에 들일 것을 명령하였고, 3일에 곧 불사에 보내고, 왕공과 사서인들이 분주히 범패를 연주하여 오랑캐 법을 만들어 피부를 태우고 진패(珍貝)를 맡기는 데 이르러 뛰고 길에 가득하니, 한유가 듣고서 싫어하여 곧 표문을 올려서 지극히 간쟁을 하니, 황제가 크게 노여워하여 가지고 재상에게 보이고, 장차 죽이려고 하였는데, 배도와 최군(崔群)이 말하기를, “한유의 말이 들추어내 거스르는 것은 죄줌이 진실로 마땅하나, 그러나 마음 속으로 지극한 충성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조금 느슨하게 해주어 신하들의 간쟁을 이르게 하소서.”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한유가 내가 부처를 받드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용납할 수 있으나, 동한에서 불교를 숭상한 이래로 천자가 모두 요절하여 죽었다고 말함에 이르러서는 어찌 괴랄(乖剌)하지 않는가? 한유는 인신으로 미치고 망녕됨이 감히 그러하니 진실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니, 이에 조정의 안과 밖에서 두려워하여 비록 척리(戚里)와 여러 귀족들이 또한 한유를 위하여 말을 하니, 곧 조주(潮州) 자사로 폄직시켰다. 이미 조주에 이르러서 애도하고 사례하는 표를 올리니, 황제가 자못 감격하고 깨달아서 다시 등용하고자 하여 가지고 재상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한유가 앞서 논한 것은 이것은 크게 짐을 사랑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마땅히 천자가 부처를 섬김에 곧 생명을 단축한다고 말해서는 안될 따름이다.”고 하니 황보단(皇甫鏄)이 평소 한유의 곧음을 시기하여 즉 아뢰기를 “비록 광소(狂䟽)하나 짐짓 내직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곧 원주자사(袁州刺史)로 고쳤다.

 초에 한유가 조주(潮州)에 이르러 백성의 질고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악계(惡溪)에 악어가 있는데 맥성의 축산을 먹어서 짐짓 다 없애니, 백성이 이 때문에 궁핍하다.”하니, 몇 일 뒤에 한유가 스스로 가서보고 그 관리인 진제(秦濟)로 하여금 한 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소를 가지고 냇물에 던져서 빌게 하였는데, 이 날 저녁에 폭풍과 우레가 시내 가운데에 일어났는데 몇 일 뒤에 물이 모두 말라 서쪽으로 60리로 옮겼다. 이로부터 조주에는 악어의 근심이 없었다.

 원주 사람이 남녀로 노예로 삼아 기약이 지나서 갚지 않는다면 진짜 노예가 되었다. 한유가 이르러 모두 품삯을 계산하여 몰수 한 것을 갚을 수 있게 하여 부모에게 돌려보내니 700여 명이었다. 인하여 더불어 노예가 됨을 금지하기를 약속하였다. 불러 국자제주(國子祭酒)에 배수하고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옮겼다.

 진주(鎭州)가 반란을 일으킴에 전홍정(田弘正)을 죽이고 왕정주(王廷湊)를 세웠다. 한유에게 조서를 내려서 선무(宣撫)하게 하였는데, 이미 감에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원진(元稹)이 ‘한유는 애석하다.’고 말하였다. 목종이 또한 뉘우쳐서 한유에게 조서를 내려 일을 헤아려 마땅함을 따르고 반드시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하니, 한유가 “어찌 군명을 받고 머무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겠는가?”하고, 마침내 빨리 들어가니, 정주가 병사를 엄하게 하여 맞이하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뜰에 진열하였다. 이미 앉음에 정주가 말하기를 “어지럽게 한 것은 곧 이 사졸들이다.”하니, 한유가 크게 소리치면서 말하기를 “천자가 공으로 장수의 재주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절을 하사하였는데, 어찌 적과 더불어 반란을 생각하는가?”함에,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병사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화를 내어 말하기를 “선태사가 나라를 위하여 주도(朱滔)를 쳐서 피묻은 옷이 오히려 있으니 이 군이 무엇을 조정에 잘못하였길래 고 적으로 여기는가?”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선태사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만약 오히려 기억함은 진실로 좋다. 또 방역과 순종의 이해를 위하여 멀리 고사를 인용하지 않고 다만 천보 연간 이래의 화복으로 너희들을 위하여 밝히리라. 안록산(安綠山) 사사명(史思明) 이희열(李希烈) 양숭의(梁崇義) 주도(朱滔) 주자(朱玼/) 오원제(吳元濟) 이사도(李師道)는 자손이 있는가? 관직한 자가 있는가?” 무리들이 말하기를 “없다.”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전공이 위주(魏州) 박주(博州) 등 6주로 귀한하니 조정이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을 받았고, 부자가 기절(旗節)을 받았다. 류오(劉悟) 이우(李祐)는 모두 대진장군이 되었으니, 이것은 너희들이 함께 들은 것이다.“하니, 무리가 말하기를 ”홍정이 각박하였기 때문에 이 군이 불안하였다.“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그렇다. 너희 무리가 전공을 해치고 또 그 집안에 잔학하게 하니, 다시 무엇을 말하리오.“하니, 무리가 곧 떠들면서 말하기를 ”시랑의 말이 옳다.“라고 하니, 정주가 무리의 마음이 동요됨을 두려워하여 갑자기 손을 저어서 물러나게 하고 인하여 울면서 한유에게 말하기를 ”지금 정주로 하여금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신책군(神策軍)의 6군의 장수 가우데에 우원익(牛元翼)과 같이 견줄 사람이 적지 않으나, 다만 조정이 대체를 돌아보면 버릴 수가 없다. 공이 오래도록 포위함을 어째서인고?“ 정주가 말하기를 ”즉시 벗어나게 하겠다.“하니, 한우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무사할 것이다.“하였다. 마침 원익이 또한 포위를 무너트리고 나가니 정주가 좇지 않았다. 한유가 돌아가 그 말을 아뢰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옮겼다. 당시에 재상 이봉길(李逢吉)이 이신(李紳)을 미워하여 축출하고자 하여 마침내 한유로 경조윤 겸 어사대부로 삼으니, 특별히 어사대가에 참여하지 말라고 조서를 내렸고 이신을 중승(中丞)에 제수하니, 이신이 과연 한유를 탄핵하여 아뢰니 한유가 조서를 스스로 해명하였다. 그 후에 문서로 비난하여 어지러웠다. 재상이 대부가 협력하지 않는 것으로 마침내 한유를 파직시켜 병부시랑으로 삼았고 이신을 강서관찰사로 쫓아내었다. 이신이 황제를 보고 머무름을 얻었고, 한유 또한 이부시랑이 되었다.

 장경(長慶) 4년에 죽으니, 나이가 57세였다. 예부상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文)이라고 하였다.

 한유의 성품은 밝고 날카로웠으며 속여서 따르지 않았다.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 처음과 끝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후진을 성취하여 이따금 이름일 알려지니 한유의 가르침을 받거든 모두 한문(韓門) 제자라고 하였다. 한유는 관직이 드러남에 점점 사양하였다. 무릇 내외의 친척 및 교제하는 벗이 후사가 없는 사람이면 위하여 고녀(孤女)를 시집보내어 그 집안을 돌보게 했다. 형수 정씨가 죽음에 기년(期年)복을 입고 은혜에 보답하였다.

 매번 말하기를 문장이 한나라의 사마상여 태사공 유향 양웅으로부터 뒤로 글을 짓는 사람은 대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유는 깊이 근본을 찾아 우뚝히 수립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었으니, 그의 원도(原道) 원성(原性) 사설(師說) 등의 수십 편은 모두 심오하고 굉심하여 맹자 양웅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고 6경을 좌우하였다. 다른 문장에 이르러서는 단서에 나아가 말을 둠은 모름지기 앞 사람을 도습하는 사람이 아니나, 그러나 오직 한유가 함에 패연히 남음이 있는 듯 하였다. 그 문도 이고 이한 황보식에 이르러서는 따라서 본받았으나 갑자기 미치지 못함이 원심(遠甚)하였다. 한유를 쫓아서 노니는 사람 맹교 장적 같은 사람은 또한 모두 스스로 당시에 이름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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