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당송팔가문논예

당송팔가문논예

황성 2008. 5. 24. 12:12
 

八大家文抄論例


 세상에서 한유의 문장을 말하면서 모두 비지(碑誌)를 으뜸이라고 말하나, 나는 유독 한유의 비지는 기굴(奇崛)하고 험휼(險譎)함이 많아서 사기와 한서에서 일을 서술하는 법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장의 운치에 혹 자유 분방한 필세가 부족하고 생각한다. 내가 간간히 또한 부족한 부분에 새겨서 기록하였고, 구양수의 비지의 문장은 홀로 사마천의 정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왕형공은 또 별도로 한 격조를 만들었으니 마땅히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서(序)와 기(記) 서(書)는 한유가 문호를 우뚝히 일으켰고 논책(論策) 이하는 마땅히 소씨(蘇氏)의 부자와 형제에 귀속된다. 사육(四六) 변려문은 내가 애초에 기록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구양공은 완려(婉麗)하고 소자첨은 비개(悲慨)하고 왕형공은 심자(深刺)하여 군신관계와 상하관계에 감동시키는 곳이 있기 때문에 기록하여 보존한다.


 내가 유자후의 문장을 관람함에 그가 의논하는 곳에 많이 날카로우니, 산수의 관경을 묘사한 곳에 유수(幽邃)하고 이광(夷曠)함이 많고, 묘지와 비갈에 이르러서는 어사(御史) 및 예부원외(禮部員外)가 되었을 적에 지은 것은 육조(六朝)의 유풍을 따른 것이 많아서 내가 기록하지 않고, 그가 영주(永州)의 사마(司馬)로 폄직된 이후에는 점점 문장의 윤택한 것 약간 수를 기록하여 그의 문기를 보였다. 그러나 창려(昌黎)와 같지 못한 것이 많다.


 송나라 여런 현자가 일을 서술함에 마땅히 구양공(歐陽公)을 으뜸으로 삼으니 어째서인가? 그의 격조는 사마천으로부터 출발하니 일체 결구와 재전(裁翦)은 법도가 있어 알맞아 감개하고 뛰어난 곳이 많으니, 내가 이러한 까닭으로 이따금 심취한다. 증공(曾鞏)의 큰 뜻은 유향(劉向)에 가까우나, 그러나 뛰어나고 격조가 있는 것은 부족하다. 왕안석의 결구의 재전은 지극히 날카로고 고심한 곳이 많아 이따금 긍지를 가지면서 엄격하고 결백하면서 법도가 있으나, 그러나 증공에게 견주어보면 다만 우열을 가리기 힘드니 모름지기 구양수에게는 일격을 양보해야 한다. 소씨의 형제에 이르러서는 대개 장공은 문학의 재능이 소산(踈傘)하고 호방한 곳이 많으나 결구(結構) 재전(裁翦) 4자는 그들이 능한 것은 아니다. 신도비(神道碑)의 글자는 많은 것은 8000-9000자이고 적은 것은 또한 4-5000자를 넘으니 마땅히 상세히하고 소략하게 하며 절제하고 펴야 할 곳은 자못 역사서의 문체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째서인가? 학의 다리는 길어야 하고 오리의 다리는 짧아야 한다. 두 사람은 책론(策論)에 있어서는 천 년 이후 뛰어나다. 그러므로 이점에 있어서 일격을 양보하는 것은 하늘은 제한한 것이다.


  내가 구양수와 소식 두 사람의 글을 보니 논(論)이 같지 않다. 구양수는 심정의 일을 서술함에 매우 곡절하기 때문에 그의 의논이 확고함이 많아서 중복되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소씨 형제는 전국책의 종횡하는 이래의 뜻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그 논의가 곧으면서 울창하여 소일(踈逸)하고 주탕(遒宕)함이 많다. 구양수는 비유하자면 강하의 물을 끌어당김에 숲을 뚫어 이랑과 도랑에 물을 대는 필세이고, 소씨의 형제는 비유하자면 강하의 물을 끌어당김에 한 번에 천리에 쏟아서 여울에는 감돌고 꺾인 곳에 물을 흐르게 하여 아득히 그것이 그칠 곳을 알지 못할 따름이다. 고어에 말하기를 “공로는 공유하면서 곡절함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니, 학자는 모름지기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소순의 역 시 서 예 악론은 잘못 된 견해를 섞었으나, 다만 그의 문장은 힘이 있고, 자첨의 대비각 등의 기문과 찬라한 등의 문장은 불교의 견해와 가까우나 그러나 또한 그의 견해가 초랑(超朗)하고, 그 사이에 또 문지가 허원하지 않음이 있어서 조금 과거의 문장에 가깝기 때문에 또한 함께 기록한다.


 증남풍의 문장은 비교적 경술에 근본하고 유향을 조술하였으니, 그의 담심(潭深)한 생각과 엄밀(嚴密)한 법칙은 절로 족히 옛 문장가와 서로 자웅을 겨룰 수 있으며 그의 광염(光燄)함은 혹 밖으로 빛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시에 조금 소씨 형제에게 가리웠으나, 유독 주자가 자극 칭찬하였고, 수 백 년을 지났어 근자에 왕도사(王道思)가 비로소 독서하여 매우 좋아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금경로(金莖露)를 마시는 듯이 하였다.


 내가 일찍이 문평을 두어 말하기를 “굴원과 송옥이래로 혼혼하며 엄숙하여 마치 긴 강과 큰 계곡과 같아서 찾음에 다함이 없고 열람함에 다하지 아니하여 백가(百家)를 함축하고 만 대를 포괄하는 것은 사마천의 문장이요, 굉심(閎深)하고 전아(典雅)하여 서경 시대 가운데 유독 유학의 으뜸이 되는 사람은 유향의 문장이요, 경위를 짐작하여 위로는 사마천을 본받고 아래로는 유향을 채택하여 부자가 일가의 말을 애써 이룸은 반고의 문학이요, 삼키고 토하며 빨리 달리고 멈추어 천리마와 같아서 붉은 우레를 달리게 하고 세찬 바람을 채찍질 하여 항상하는 것은 산이 멈춘 듯하고 기괴한 것은 우레가 치는 듯한 것은 한유의 문장이다. 우뚝한 바위 높이 솟은 산이 마치 높은 구릉과 가파른 절벽에 치달림에 계곡의 바람과 처연한 비가 사방에서 다가오는 듯한 것은 류종원의 문장이다. 주려(遒麗)하고 일탕(逸宕)하여 마치 미인을 데리고 동산에서 연회하며 노닒에 풍류와 문물이 강좌(江左)에 빛나는 듯한 것은 구양수의 문장이다. 마땅히 가야할 곳에서 나아가고 마땅히 그칠 곳에 그치서 호호(浩浩)하고 양양(洋洋)하여 천리의 강물에 나아가서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듯한 것은 소식의 문장이다.

 아! 일곱 사람은 문장에 있어서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머지 가의 동중서 사마상여 양웅 여러 군자는 재주와 문학이 찬연한 서경의 문장이나 그들은 지극한 것은 아니다. 증공 왕안석 소순 소식 소철이 지극하다. 증공은 더욱 대도를 절충하여 그 정도를 잃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의 재주는 혹 피곤하여 부합되지 못한다.

 내가 애오라지 차례 짓기를 아래와 같이하여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감상하기를 기다린다.


 팔가이하는 나는 본조에 있어서 유독 왕양명의 논학(論學) 제서와 기학(記學) 기존경각(記尊經閣) 등의 문장을 사랑하니, 정자와 주자는 하고자 하였으나 능하지는 못하였다. 강서사작(江西辭爵) 및 무전주(撫田州) 등의 소는 당나라의 육선공 송나라의 이충정공이 미치는 못하는 것이다. 즉 이두통강군공(浰頭桶岡軍功) 등의 소는 병정을 정렬시킴을 마치 손바닥을 보는 듯 하는데, 하물며 그 복병을 숨기고 기괴함을 냄에 선후 본말이 병법에 합치하는 것이 많지만 사람들이 특별히 그가 조금 공을 자랑하는 것으로 치부시켜서 이따금 입으로 비난할 따름이다.

 아! 공은 진실로 백세의 뛰어난 인물이니 구구한 문장의 공교로움은 언급하지 않는다. 내가 특별히 여기에 붙여서 우리 본조 한 시대의 호걸을 보이니 후세에 문장을 품평하는 사람은 마땅히 절로 정한 의논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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