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당송팔가문총서

당송팔가문총서

황성 2008. 5. 24. 12:08
 

당송팔대가문초총서


 공자가 주역의 계사에 말하기를 “그 뜻이 멀고 그 말이 문채난다.”라고 하였으니, 천하 후세에 문장을 짓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바가 지극하다. 그러나 문하에 미친 선비들, 안연 자공 이하는 모두 제노 사이의 수재요. 혹 몸소 六藝에 통달한 사람이 70여명 가운데에 문학의 과목에는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고, 해당되는 사람은 겨우 자유 자하 두 사람이었으니, 왜 그런고? 대개 하늘이 현철을 낳음에 각각 홀로 품부 받은 것이 있으니 비유하자면, 샘 가운데에 온천과 불 가운데 찬불과 돌 가운데 結綠과 쇠 가운데 指南이니, 사람이 그 사이에 유독 기를 품부받았으며 또 반드시 위하여 전일하게 하여 그 지극함에 이르게 하니, 伶倫이 음악에 대해서와 裨鼂//가 점괘에 대해서와 養由基가 활쏘기에 대해서와 造父가 수레 모는 것에 대해서와 扁鵲이 의술에 대해서와 遼가 丸에 대해서와 혁추가 바둑에 있어서 저들은 모두 하늘이 준 지혜로 전일의 학문을 더하여서 홀로 그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당시를 천단하여 후세에 이름이 났으니 다른 이들은 서로 겨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죽음에 자유와 자하의 무리들이 각각 그 학문으로 제후의 나라에 교수가 되었다. 이윽고 산일하여 전함이 없었고 진나라 사람이 경서를 불태우고 학사들을 구덩이에 묻음에 육예의 뜻이 거의 그치게 되었다.   

 한나라가 중흥함에 망실된 경전을 불러모으고 학사들을 구하였으니 조조 가의 동중서 사마천 류향 양웅 반고의 무리들이 비로소 점점 출현하여 서경의 문장을 爾雅之文이라고 불렀다. 최인과 蔡邕 이하가 교연히 용양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육예의 뜻은 점점 유실되어서 위진 송 제 양 진 수 당의 사이에 문장이 날로 부미해지고 기운이 날로 유약하여 강한 활살의 끝이 노나라의 비단을 뚫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쇠를 뚫음에랴?

 창려 한유가 먼저 출현하여 떨쳤고, 류유주가 또 따라서 화답하였다. 이에 비로소 육경이 아니면 읽지 못하고 선진 양한의 서가 아니면 보지 못함을 알았으니, 그가 지은 바 서 론 서 기 비 명 송 변 등의 여러 글은 짐짓 홀로 문호를 연 것이 많다. 그러나 대체로 비교하면 육예의 유지에서 찾아 대략 서로 오르내리고 전후로 도운 것이다. 貞元이후에 당나라가 또 중간에 실추되었고 이어서 오대의 병화의 즈음에 미쳐서 천하가 쓸쓸하였다.

 송나라가 흥기한 지 100년에 문운을 하늘이 열어주니, 이에 구양수가 隋州 고가의 覆瓿의 가운데로부터 우연히 한유의 글을 얻어 손수 읽고 좋아하니 천하의 선비들이 비로소 경전에 통하고 고전에 박식함이 고아함이 됨을 알았으니 당시의 문인과 학사들이 빈빈하게 붙어서 일어나니 소씨 부자와 형제 및 증공 왕안석의 무리가 그 사이에서 재지의 대소와 음향의 완급은 비록 같지 않으나 요컨대 공자의 육예를 산삭한 유지에서 함께 집집마다 익히고 문호마다 보았다. 지금으로 말미암아 관찰한다면, 비유하자면 세상에 騕褭와 騏驥를 천리의 사이에서 달림에 중간에 200리 300리에 미쳐서 그치는 자가 있으니, 길은 계주로 잡으면서 수레는 월땅으로 모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문장을 잡은 사람이 이따금 문장은 ‘시절과 더불어 오르내리니 당나라 이후에 또 보잘 것 없어서 족히 할 수가 없다.’라고 하니 아 문장은 다만 도와 더불어 서로 흥성하며 쇠락하고 시절은 거론할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공교롭고 공교롭지 못 것은 또 이 사람의 품부 받음과 그 전일함의 지극한지 하지 않지가 어떠한 지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만일 말한 바와 같다면 반드시 대갱 현주의 숭상함과 모자 토궤를 진설함에 三代 이하의 명당 옥대와 운뢰 희준의 설치는 모두 무용지물일 따름이다.

 공자가 말한 ‘기지원’은 곧 도에 어긋나지 않음이요, ‘기사문’은 곧 도의 빛남이 일월 五星이 굽이굽이 펼쳐짐과 같다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疱犧이래로 인문을 바꾸지 않는 통서이니 어찌 세대를 따지랴?

 우리 명나라 홍차와 정덕 연간에 이몽양이 북방에서 우뚝히 일어나니 호걸이 모여서 이미 시의 명성을 떨치고 다시 문궤를 들어서 말하기를, “좌전 사기와 한서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나의 시는 황초체와 건안체이다.”라고 하니,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만 ‘사림의 영웅일 따름이다.’ 그 옛적 육예의 유지에 대해서는 어찌 침음하고 난잡하여 서로 절취할 따름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손수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의 문장을 철습하고 조금 비평하여 문장을 잡은 사람의 증표를 만들고 팔대가문초라고 제목하고, 문장가마다 각각 인과 조소를 둠을 아래와 같이 하였다.     

 아 이 팔군자는 감히 갑자기 옛 육예의 유지를 모두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내가 비평한 것은 또한 감히 스스로 팔군자의 깊이를 얻었다고 할 수가 없다. 요컨대, 대의에 달린 바 지차와 점철은 혹 도에 서로 어긋나지 않을 따름이다. 삼가 기록하여 세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의 질정을 기다린다.

 만력 기묘년 8월에 귀안 녹문 모곤이 찬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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