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열전/범중엄

범중엄

황성 2007. 11. 7. 00:20
 

범중엄(范仲淹) 

 - 송사 권314, 열전 제73 -


  범중엄의 자는 희문(希文)이니 당나라 재상 이빙(履氷)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는 빈주(邠州) 사람이다. 뒷날 집을 강남으로 옮겨서 마침내 소주(蘇州)의 오현(吳縣) 사람이 되었다.

  중엄이 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장산(長山)의 주씨(朱氏)에게 시집가서 그의 성명을 따라서 말하였다. 어렸을 적에 지조가 있었고 이미 장성함에 자신의 세가를 알고서는 감읍하여 어머니에게 사과하고 응천부(應天府)에 가서 친척에 의지하여 함께 문학을 공부하여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였다. 겨울에 고달픔이 심하면 물로 세수하고 음식이 넉넉하지 못하여 죽을 먹음에 이르렀으니,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거늘 중엄은 고달프게 여기지 않았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광덕군 사리참군(廣德軍司理參軍)이 되어서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서 돌아와 봉양하고 집경군절도추관(集慶軍節度推官)으로 옮겨서 처음 성을 회복하고 이름을 바꾸었다. 태주 서계 염세(泰州西溪鹽稅)를 감독하였으며,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옮겼고, 감초주량료원(監楚州糧料院)으로 옮겨서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안수(晏殊)가 응천부를 다스렸는데, 중엄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부학(府學)에 두었더니 글을 올려 택군수(擇郡守) 거현령(擧縣令) 척유타(斥游惰) 거용참(去冗僭) 신선거(愼選擧) 무장수(撫將帥)를 청하니 무릇 만여 글자였다.

 상복을 벗고 안수의 천거로 비각교리(秘閣校理)가 되었다. 중엄은 6경에 두루 통달하고 주역에 능하니 학자들이 많이 쫓아서 질문하니 위하여 경전을 잡고 강해(講解)함에 게으른 바가 없었다. 일찍이 그의 봉급을 미루어서 사방의 유사를 먹였는데, 여러 선비들이 이르러 옷을 바꾸어서 갔으나 중엄은 편안한 듯 하였다. 매번 격앙하여 천하의 일을 논함에 고군분투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 당시의 사대부가 자신을 바르고 부지런히 힘쓰고 풍절(風節)을 숭상함은 범중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성(天聖) 7년(1029)에 장헌태후(章獻太后)가 장차 동지에 조회를 받으려 함에 천자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축수를 올리려 하니, 중엄이 극언하여 짐짓 말하기를 “어버이를 안에서 봉양함은 절로 가인(家人)의 예가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백관과 더불어 반열을 함께 하여 조회하니 후세에 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또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청컨대, 태후께서는 정사를 돌려주십시오.”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하중부(河中府)에 통판(通判)이 되었고, 진주(陳州)로 옮겼다. 당시에 바야흐로 태일궁(太一宮) 및 홍복원(洪福院)을 건축함에 재목을 섬서(陝西)에서 구입하였는데, 중엄이 말하기를 “소응(昭應) 수녕(壽寧)은 하늘의 경계가 멀지 않거늘 지금 또 토목을 사치스럽게 하여 백성의 재산을 파산시킴은 인심을 순히 하고 천의에 합하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사관(寺觀)을 수리함을 멈추고 상세(常歲) 시목(市木)의 수를 줄여서 쌓인 부세를 제거하소서.”하였다.

 또 말하기를 “은총이 많이 내강(內降)으로 관직을 제수함은 태평시절의 정사가 아닙니다.”하였으니, 일이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인종이 충신이라고 여겨서 태후가 붕함에 불러서 우사간(右司諫)으로 삼았다. 일을 말하는 사람이 태후 시절의 일이 드러내는 일이 많았는데, 중엄이 말하기를 “태후가 선제에게 유명을 받아서 폐하를 보호한지 10여 년이니, 마땅히 태후의 작은 일을 가려서 태후의 덕의 온전히 해야 합니다.”하니, 황제가 위하여 조서로  ‘안과 밖의 관리들은 문득 태후 시절의 일을 말하기 말라.’고 하였다.

 초에 태후가 고(誥)를 남겨서 ‘태비(太妃)인 양씨를 황태후로 삼아 군국(軍國)의 일에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라.’하였는데, 중엄이 말하기를 ”태후라는 것은 어머니의 칭호입니다. 예로부터 보육으로 인하여 대신 새움은 없습니다. 지금 한 태후가 붕하심에 또 한 태후를 세우니 천하의 사람들이 장차 폐하가 하루라도 모후의 도움이 없을 수 없음을 의심할 것입니다.“ 하였다.

 해가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강회(江淮)와 경동(京東)이 더욱 심하였는데, 중엄이 사신을 보내어 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에 사이를 얻어 청간하기를, “궁중에서는 반 낮을 동안 먹지 않는다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하니, 황제가 측연하게 여겨서 곧 중엄에게 명령하여 강회(江淮) 지방을 안무하게 하니, 이르는 곳에 창고를 열어서 구휼하고 또 백성들의 음란한 제사를 금하고, 여주(廬州)와 서주(舒州)의 절역다(折役茶)와 강동(江東) 장정의 염전(鹽錢)을 제거함을 아뢰고, 또 폐단을 구하는 10가지 일에 대해서 조목을 만들어 올렸다. 마침 곽황후(郭皇后)가 폐후가 됨에 간관(諫官)과 어사를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 하였으나, 얻지못하였다. 다음 날에 백관을 머물러 재상에게 읍을 하고 정쟁(廷爭)하여 바야흐로 대루원(待漏院)에 이르렀는데, 조서가 있어 나가서 육주(陸州)을 맡아 다스렸다. 한 해 남짓에 소주(蘇州)로 옮겼는데, 소주에서 큰 홍수가 나서 민성의 전답을 경작할 수 없게 되니, 중엄이 오하(五河)를 소통시키고 태호(大湖)를 인도하여서 바다로 흘러가게 하려 하여 인부를 모집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윽고 명주(明州)로 옮기려 함에 전운사(轉運使)가 아뢰어 중엄을 머무르게 하여 일을 마치게 하니, 허락하였다.

 상서 예부 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 천장각 대제(天章閣待制)에 배수되었고, 불러서 돌아와 국자감(國子監) 판서가 되었고,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 권지 개봉부(權知開封府)로 옮겼다. 당시에 여이간(呂夷簡)이 집정하여 나오게 하여 등용한 사람이 많이 그의 문하에서 나오거늘 중엄이 백관도(百官圖)를 올려서 그 차례를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차례대로 옮기는 것이 되고 이와같이 하면 차례가 되지 않고 이와 같이 하면 공평하고 이와 같이 하면 사사로움이 되는데, 하물며 가까운 신하를 등용함에 있었으랴? 무릇 격식을 초월하는 사람은 마땅히 온전히 재상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하니, 이간이 기뻐하지 아니 하였다. 다른 날 도읍을 건설하는 일을 논의하니, 중임이 말하기를 “낙양(洛陽)은 험하며 굳건하고 변주(汴州)는 사방으로 싸우는 곳이 되니, 태평시절에는 마땅히 변주에 거처하고, 곧 일이 있거든 반드시 낙양에 거처하여 마땅히 점점 저축을 넓히고 궁실을 다스려야 합니다.”하니, 황제가 이간에게 물으니, 이간이 말하기를 “이것은 중엄의 오활한 의논입니다.”하였다. 중엄이 이에 사론(四論)을 만들어서 바치니, 대저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고 절실하게 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한나라 성제(成帝)가 장우(張禹)를 믿어서 처가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망(新莽)의 화가 있었으니, 신은 오늘날 또한 장우가 있어 폐하의 가법을 무너뜨릴까 두렵습니다.”하니, 이간이 노여워하며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중엄이 폐하의 군신을 이간시키니 끌어서 등용한 사람은 모두 붕당(朋黨)입니다.”하였다. 중엄이 대응하기를 더욱 간절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파직되어 요주(饒州)를 맡았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한독(韓瀆)이 재상의 뜻에 아부하여 중엄의 붕당을 써서 조당에 걸기를 청하였다. 이에 비서승(秘書丞) 여정(余靖)이 말하기를 “중엄이 한 마디 말로 재상을 거슬러서 갑자기 폄찬(貶竄)을 더하였는데, 하물며 앞서 말한 것이 폐하의 모자와 부부의 사이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폐하께서 이미 넉넉히 용납하였으니, 신은 앞의 명령을 돌이켜 고치기를 청합니다.”하니, 태자 중윤(太子中允) 윤수(尹洙)가 스스로 송사하여 중엄과 사우가 되고 또 일찍이 자기를 천거하였으니, 원하건대 강출(降黜)함을 따르게 하였다. 관각 교감(館閣校勘) 구양수(歐陽修)가 고약눌(高若訥)이 간관(諫官)에 있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보고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글을 옮겨서 꾸짖었다. 이 때문에 세 사람이 모두 연좌되어 폄직되었다. 다음해에 이간이 또한 파직되었다. 이것으로부터 붕당의 의론이 일어났다. 중엄이 이미 떠나갔는데, 사대부가 위하여 천거를 논의함이 그치지 않거늘 인종이 재상인 장사손(張士遜)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중엄을 폄직시킨 것은 그가 몰래 황태제를 세우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붕당이 천거를 말함이 이와 같으니 어떠게 하는가?”하고, 다시 조서를 내려서 경계하였다. 중엄이 요주에 있은 지 한 해가 지났는데 윤주(潤州)로 옮겼고, 또 월주(越州)로 옮겼다. 이원호(李元昊,1004-1048)가 반란을 일으키니 불러서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지영흥군(知永興軍)이 되었고, 옮겨서 섬서전운사(陝西轉運使)가 되었다. 마침 하송(夏竦)이 섬서경략안무초토사(陝西經略安撫招討使)가 되어 중엄을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에 나아가 돕게 하였다. 이간이 다시 들어와 재상에 되니, 황제가 중엄을 깨우쳐서 앞전의 유감을 풀게 하니 중엄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신이 지난 번에 논한 것은 대개 국가의 일이고 이간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 연주(延州)의 여러 성채를 수리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중엄이 스스로 순행하기를 청하여 호부랑중(戶部郞中) 겸 지연주(知延州)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변방의 병사를 총관령(總管領) 만인(萬人) 검할령(鈐轄領) 오천인(五千人) 도감령(都監領) 삼천인(三千人)으로 나누어 도적이 이르러 방어하면 관직이 낮은 사람이 먼저 나아가게 하니, 중엄이 말하기를 “장수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관직으로 선후로 삼는다면 패배를 취하는 길이다.”하고, 여기에서 크게 연주의 병사를 사열하여 1만 8천 명을 얻어서 나누어 여섯으로 만들고 각각 3,000명을 거느리고 부를 나누어 교련시키고, 적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번갈아 나아가 적을 막게 하였다. 당시에 변방의 문이 태평을 이어서 여러 성채가 이미 무너지니, 종세형(種世衡)의 계책을 사용하여 청간(靑澗)에 성을 세우고 적의 공격을 막게 하고, 크게 둔전을 일으키고, 또 백성들에게 허락하여 서로 거래를 하여 유무(有無)를 통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멀리 옮기는 노고로 녹성을 세워 군(軍)으로 삼고, 하중(河中)과 동화(同華)의 중하호(中下戶)의 조서로 곧 옮기고, 봄과 가을에 병사를 옮겨 먹을 수 있게 하고, 적(糴)의 10분에 3을 생략할 수 있게 하고, 다른 감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조서로 강정군(康定軍)을 만들었다. 다음 해 정월에 여러 노(路)에 조서를 내려 들어가 토벌하게 하니, 중엄이 말하기를 “정월은 변방의 밖이 크게 추우니 우리의 군사가 노숙을 합니다. 봄을 기다려 깊이 들어감만 못하니, 적의 말이 야위고 사람이 굶주리니 형세가 제어하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변경의 수비을 점점 갖추어서 군사를 냄에 기강이 있다면 적이 비록 창궐(猖獗)하나 진실로 이미 그들의 기세를 꺾일 것입니다. 부주(鄜州)와 연주(延州)는 영하(靈夏)와 매우 가까우니 서강(西羌)에 반드시 말미암는 길입니다. 다만 병사를 어루만지고 움직이지 않고 그들의 허세를 보아 신에게 점점 은혜와 신의로 초래하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정의가 막히고 끊어질 것입니다. 신은 전쟁이 종식됨을 기약하지 못함을 두려워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효과가 없을 것 같으면 마땅히 군사를 움직여서 먼저 유주(緌州)와 유주(宥州)를 취하고 요해지를 점령하고 병영을 만들고 군전을 경영하여 지구의 계책을 만든다면 다산(茶山)과 횡산(橫山)의 민생이 반드시 가족을 데리고 올 것이니 강토를 열고 도적을 막는 것이 계상의 으뜸입니다.”하니, 황제가 모두 그의 의논을 사용하였다. 중엄이 또 청하기를 “승평(承平)과 영평(永平) 등의 성채를 수리하여 점점 유민들을 불러드려서 보장(堡障)을 안정시키고 척하병을 통하게 해야 합니다.”하고 12성채를 축성하니, 이에 강한(羌漢)의 백성들이 발굼치를 이어서 본업에 돌아갔다. 오래되어 이원호(李元昊)가 항복한 장수 고연덕(高延德)을 보내어 인하여 중엄과 더불어 화친을 약속하니, 중엄이 편지로 경계하고 깨우쳤다. 마침 임복(任福)이 호수천(好水川)에서 패배하니, 원호 답서의 말이 불손하니, 중엄이 온 사신을 대하여 태우니, 대신들이 문득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합당하지 않고, 또 문득 편지를 태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송상(宋庠)이 중엄을 참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고, 본조원외랑(本曹員外郞)으로 강등하여 요주를 다스리게 하였고, 또 경주(慶州)로 옮겼고, 좌사랑중(左司郞中)으로 옮겨 환경로경략안무연변초토사(環慶路經略按撫緣邊招討使)가 되었다.

 처음에 원호가 반란하여 몰래 강족을 꾀어서 부탁하여 돕게 하였는데, 환경(環慶)의 추장 600명이 약속하여 길을 안내하기로 하였는데 일이 이윽고 발각되었다. 중엄이 그들이 반복하고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부에 이르러 즉시 행변(行邊)에 아뢰고 조서로 여러 강족을 위로하고 상을 내리고, 그들의 인마(人馬)를 사열하여 조약을 만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원수가 이미 화친을 결단하였는데, 문득 사사롭게 보복을 하여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양 100마리 말 2마리를 벌로 주고 이미 죽인자는 참수한다. 빛을 등지고 송사함에 관리에게 알려 다스림을 들어야하는데 문득 평인(平人)을 질박하면 양 50마리를 벌하고 적의 인마가 경계에 들어와 추집하였는데 나오지 않고 본족을 따르면 매 가구마다 양 2마리를 벌하고 수령을 볼모로 잡는다. 적이 크게 들어오면 늙은이와 어린아이는 들어와 본채(本砦)에서 보호하여 관리들이 음식을 주고, 만약 성채에 들어오지 않으면 본가는 양 2마리를 벌주고 온 가족이 이르지 않으면 수령을 잡는다 하였다. 여러 강족이 모두 명을 받으니 이로부터 처음 한의 쓰임이 되었다.

 빈주(邠州)의 관찰사가 되니, 중엄이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관찰사는 반열이 제하(制下)를 기다리니 신이 변방을 지킨 지 수 년에 姜人이 자못 신을 친애하여 신을 용도노자(龍圖老子)라 부르니 지금 물러나 왕흥(王興)․주관(朱觀)과 더불어 같은 항열이 되니, 다만 적들이 나를 가볍게 여길까 두렵습니다.”라고 하고 사양하고 배수하지 않았다.      

 경주의 서북 마포채(馬鋪砦)가 후교천(後橋川)의 입구에 당하여 적의 심장부에 있었다. 중엄이 성을 쌓고자 함에 적이 반드시 싸울 것을 헤아려 비밀리에 아들 범순우(范純祐)와 번장 조명(趙明)을 보내어 먼저 그 땅을 점거하게 하고 병사를 이끌고 따르니 제장들은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행차가 유원(柔遠)에 이르러 비로소 호령하여 판축(版築)이 모두 갖추어 지니 열흘만에 성이 이루어지니 대순성(大順城)이었다. 적이 깨닫고 기병 3만으로 와서 싸워 거짓 패배하니 중엄이 추격하지 말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복병이 이었다. 대순에 이미 성을 쌓으니 백표(白豹)와 금탕(金湯)이 모두 감히 침범하지 않아 환주와 경주가 이 때로부터 침공이 적었다. 명주(明珠)에서 장경의 병사 수만을 잃음에 중엄이 경원에서 엄습하고자 함을 듣고 상언하기를 두 부족은 길이 험난하여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전날에 고계숭(高繼崇)이 이미 군사를 잃고, 평시에 또 반란을 생각하니 지금 토벌한다면 반드시 적과 표리가 되어 남으로 원주에 들어오고 서로 진융을 요란케 하고 동으로 환주를 침입하여 변방의 근심이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북으로 세요 호로 중천을 취하여 보장을 만들어 적의 길을 끊는다면 두 부족이 편안하고 환주와 진융에 길이 통하여 근심을 없을 것입니다. 그 뒤에 드디어 서요와 호로의 여러 성채를 쌓았다 葛懷民이 정천에서 패하자 적이 크게 노략질 하여 번원에 이르니 관중이 떨고 두려워하여 백성들이 많이 산으로 숨었다. 중엄이 무리를 6천을 거느리고 빈경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니, 적이 이미 변방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곧 돌아왔다. 처음에 정천의 일이 들려짐에 황제가 지도를 살피고 좌우에 말하길 중엄이 출정하여 구원다면 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보고가 이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길 내 진실로 중엄을 등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추밀직학사 우간의대부로 승진시켰는데, 중엄이 군사가 나가 공이 없는 것으로 사양하고 감히 받지 않았으나 조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미 문언박(文彦博)으로 경원지방의 경략사가 되었는데, 황제가 경원 땅을 잃은 것으로 중엄으로 대신하고자 하여 왕회덕을 보내여 회유하니 중엄이 사양하여 말하길, 경원은 땅이 소중하니 다만 신은 이 로(路)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한기(韓琦)와 더불어 함께 경원의 경략이 되어 함께 경주에 주둔하며 한기는 진봉을 겸하고 신은 환경을 겸하여 경원이 경계가 있으면 신이 한기와 더불어 진봉 환경의 병사와 더불어 나란히 나아가고, 만약 진봉과 환경에 경계가 있으면 또한 경원의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할 것입니다. 신은 마땅히 한기와 더불어 병사를 훈련시키고 장수를 선발하여 점점 횡산을 회복하여 적의 팔을 끊는다면 몇 년 되지 않아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방적(龐籍)에게 조시를 내려 환경을 겸하여 거느려 수미의 형세를 이루게 하고 진주는 문언박에게 맡기고 경주는 등종량을 등용하여 총괄하게 하고, 손면(孫沔) 또한 일을 이루 수 있을 것이요, 위주는 한 무장이면 족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채용하였다. 다시 섬서로안무경략초토사(陝西路安撫經略招討使)에 두어 중엄과 한기와 방적으로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중엄이 한기와 더불어 경주 개부(開府)가 되고 문언박을 옮겨 진주를 거느리게 하고 등종량은 경주를 거느리고 장항은 위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중엄은 장수가 되어 호령이 명백하고 사졸을 어루만짐에 여러 강족이 오는 자를 마음을 미루어 대접함에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적들이 또한 감히 문득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 원호가 화친을 청하자 불러 추밀부사에 배수하였다. 왕거정이 게으르고 묵묵하여 일을 감당하지 못하니 간관 구양수 등이 중엄은 재상의 재주가 있으니 청컨대 왕거정을 파면하고 중엄을 등용하십시오 하여, 드디어 참지정사로 옮기니 중엄이 집정을 간관으로 얻을 수 있는가 하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고 한기와 더불어 행변으로 나가기를 청하하니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로 삼았다. 결행되지 않고 차지정사에 제수 되었다.       

마침 왕륜(王倫)이 회남(淮南)을 노략질하니 주현의 관리 가운데 능히 지키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거늘 조정에서 주벌하고자 하였는데 중엄이 말하길 “평상시에 무비를 말함을 꺼리다가 도적이 이르면 오로지 지키는 관리의 죽임을 책망함이 옳은가? 수령은 모두 죽일 수 없다.” 하였다.

 황제가 태평시절에 관심을 가져 자주 당시의 일을 물으니, 중엄이 사람들에게 말하길, “상이 나를 등용한 것이 지극하다. 일에는 선후가 있으니 오래도록 안주하는 폐단은 하루 아침에 개혁할 수가 없다.”하였다. 황제가 다시 직접 쓴 조서를 하사하고, 또 그를 위하여 천장각을 열고, 이부(二府)1)를 불러서 조목조목 대답하게 하니, 중엄이 황공해 하면서 물러나  10사를 올렸다.

 첫째, 출척을 분명하게 함이다. 이부는 큰 공과 큰 선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천거하지 말고, 안과 밖에서 모름지기 관직에 있게 함을 3년을 채우고, 경사에 있는 백관들은 천거하여 주지 아니하고, 모름지기 통틀어 5년을 채워 곧 마감(磨勘)할 수 있게 하여야 거의 공적을 상고하는 법에 가까울 것입니다.

 둘째, 요행을 억제함이다. 소경감(小卿勘) 이상의 건원절(乾元節) 은택과 정랑(正郞)이하 감사변임(監司邊任)과 같은 것을 혁파하여 모름지기 관직에 있은 지 삼년을 채워야 비로소 음자(蔭子)를 얻게 하고, 대신은 자제를 천거하여서 관각(館閣)의 직분을 맡지 못하게 하면 임자(任子)의 법령이 쓸데없이 넘침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공거를 정밀하게 함이다. 진사와 제과는 청컨대, 호명법(糊名法 )을 혁파하여 행실의 허물이 없는 사람을 참고하여 이름으로 들리게 하여야 합니다. 진사는 책론을 먼저하고 시부를 뒤에 해야 합니다. 제과는 경의에 겸하여 통달한 사람을 취하여 사제(賜第)이상은 모두 조재(詔裁)를 취하고 나머지 우등은 선발을 면제하여 관리에 임명하고, 다음 가는 사람은 본과의 선발을 지키게 하면 진사의 법령이 이름을 따라서 실효를 바랄 수 있습니다.

 넷째, 장관을 선발함입니다. 중서추밀원에 맡겨서 먼저 전운사를 선발하여 형옥과 대번의 지주를 점검하고, 다음은 양제삼사 어사대 개봉부관 제로감사에게 맡겨서 지주통판을 천거하게 하고 지주통판은 지현령에게 천거하게 하여 사람의 숫자를 제한하여 거주다자//

중서의 선발과 제거를 따르게 하면 자사와 현령이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공전을 균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외직 관리의 봉급이 균등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들이 선행을 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청컨대, 그들의 수입을 균등하게 하여 다만 지급하여 스스로 봉양할 수 있게 한 뒤에 청렴과 절개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본받지 않는 사람은 주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농상을 두터이 하는 것입니다. 매 해마다 미리 제로에 내려서 관리와 백성들에게 소문을 내어 농전의 이익과 해를 말하고, 제방과 도랑 못은 주현이 관리를 선발하여 다스리게 하고, 농업을 권장하는 법을 정하여 농업의 이익을 일으키고, 漕運을 줄여서 강남의 제방과 浙西의 河塘의 휴폐한 것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 무비를 수리하는 것입니다. 부병의 법령을 요약하여 畿輔의 강장들을 모집하여 衛士롤 삼아 정병을 돕게 하여 봄 여름 가을에는 농업에 힘쓰게 하고 겨울에는 군사 훈련을 하여 봉급의 비용을 줄여서 기보에 이룬 법이 있게 하면 여러 도가 모두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덟째, 은신을 미룸이다. 사면령이 시행할 곳이 있으면 담당자가 머뭇거리고 어기는 사람은 무겁게 법을 두고 별견사(別遣使)가 마땅히 시행해야 할 것을 살펴보아 있는 곳마다 상의 은혜를 폐하거나 막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홉째, 명령을 엄중하게 함이다. 법도는 신의를 보이는 바이니, 시행하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돌아서면 고치기보다는 청컨대, 정사의 신하가 오래할 수 있는 것을 참고하고 의논하여 번거로운 것을 줄이고 제도를 마름질하여 시행을 내린다면 자주 변경함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열째, 요역을 줄임이다. 호구가 줄어서 부역이 더욱 많아지면 현읍의 호구가 작은 것을 줄여서 진(鎭)을 만들고 사주(使州) 양원을 아울러 하나로 만들고 관직 가운데 헛되이 직명만 있는 경우 주의 병사에 소속시켜 응당 부역을 맡지 않는 사람은 모두 농업에 돌아간다면 백성들이 거듭된 곤란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천자가 바야흐로 믿어서 중엄을 향하여 모두 채용하게 하여 법령으로 만들기에 적당한 것은 조서로 만들어 반포하여 내렸으나 오직 부(府)의 병법은 여럿이 불가하다고 하여 거쳤다.

 또 건의하여 말하길, 주나라 제도에 삼공이 육관의 직분을 나누어 겸직하였고, 한은 삼공으로 육경을 나누어 거느렸고, 당은 재상으로 육조를 나누어 맡았습니다. 지금 중서성은 예전 천관총재요, 추밀원은 예전 하관사마이고, 네 관직은 여러 유사들에게 흩어져 있어 삼공이 겸직하여 거느리는 중임이 없고 이부(二府)가 오직 등용하고 파직하며 봉급을 원활하게 하고 상벌을 의논하며 조례를 점검할 따름이니, 위로는 삼공이 도를 논의하는 직임이 아니고, 아래로는 육경이 왕을 보좌하는 직분이 없으니 다스려진 법이 아닙니다. 신은 청컨대 전대를 모방하여 삼사(三司) 사농(司農) 심관(審官) 유내전(流內銓) 삼반원(三班院) 국자감(國子監) 태상(太常) 형부(刑部) 심형(審刑) 대리(大理) 군목(群牧) 전전마병군사(殿前馬兵軍司)로 각각 보좌하는 신하에게 맡겨서 겸하여 그 일을 맡게 하고, 무릇 관리의 출척과 형벌의 경중에 있어서 일의 이해가 있는 것은 아울러 보신(輔臣)을 따라서 임명하고 빼앗고 그 체의 큰 것은 이부가 함께 의논하여 주달하여 맡게 하소서. 신은 청컨대, 스스로 병부의 직책을 맡겼습니다. 만약 도움이 없다면 청컨대 우선 출강하소서. 하니 장득상(章得象) 등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참지정사 가창조(賈昌朝)에게 명령하여 농전을 거느리게 하고 중엄은 형법을 거느리게 하였으나 끝내 실행을 결단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중엄이 여이간을 거슬려서 바깥 관직으로 나간 것이 몇 해였는데, 사대부가 두 사람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손가락질하여 붕당을 만들었더니 섬서 지방에 병사를 움직임에 미쳐서 천자가 중엄이 선비들의 신망이 솔리는 바로 인하여 발탁하여 등용하였고, 여이간이 파직됨에 불러 돌아와 천자가 의지하여 다스리니 중외가 그의 공업을 바랬는데 중엄이 천하로 자기의 일로 삼아서 요행을 없애고 관리를 상고하여 조사하여 밤낮으로 도모하여 태평을 일으켜 이루었으나 갱장(更張)이 점점함이 없고 규모가 커서 행할 수 없다고 여겼다. 안찰사로 나감에 미쳐서 탄핵하는 바가 많으니 사람들이 기뻐하지 하고 임자(任子)의 은혜가 적어지고 磨勘의 법이 치밀함으로부터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비방이 점점 행해져서 붕당의 논의가 점점 군주에게 들렸다.

 마침 변방의 수비가 경계가 있어서 인하여 추밀부사 富弼과 더불어 변방에 행차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중엄으로 하동섬서선무사로 삼고 황금 100량을 하사하였더니 모두 나누어 누나오 변방의 장수에게 주었다.

 麟州에 새로 적의 침입을 근심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버리기를 청함이 많았으나, 중엄이 위하여 옛 성채를 수리하여 유민 3,000호를 불러서 돌아오게 하고, 그들의 조세를 감면해주고 榷酤를 제거하여 백성에게 주었다. 또 府州 상업의 조세를 감면해주기를 아뢰니 河外가 마침내 편안하였다. 떠남에 미쳐서 공격하는 자가 더욱 조급하게 하니, 중엄이 또한 스스로 참지정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이에 資政殿學士 陝西四路宣撫使 知邠州로 임명하였다. 그가 중서성에 있으면서 시행한 것이 또한 점점 저지되고 무너지니 병으로 鄧州로 가기를 청하여 給事中에 나아갔다. 荊南으로 옮김에 등주 사람들이 사신을 막고 머물러 두기를 청하고 중엄도 또한 등주에 머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윽고 杭州로 옮겼고, 다시 호부시랑에 천거되었으며, 靑州로 옮겼다.

 마침 병이 위중하여 穎州로 가기를 청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죽으니, 나이가 64세였다. 병부상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文正이다.

 초에 중엄의 병이 위중하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고 위문하였고, 이미 죽음에 탄식하고 슬퍼하기를 오래하였으며, 또 사신을 보내어 나아가 그의 집안에 문상하고, 이미 장사 지냄에 황제가 친히 그의 비를 써서 ‘褒賢之碑’라 하였다.

 중엄은 안으로 강직하고 밖으로는 온화하였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러웠다. 어머니가 계실때의 가난함으로 그 뒤에 비록 귀하게 되었으나 빈객이 아니면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처자의 의복은 겨우 스스로 충당하게 하였으나 베풀기를 좋아하여 義莊을 마을 중게 두어 족인들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널리 무리를 사랑하고 선을 즐기니 선비가 많이 그의 문하에서 나와서 비록 여항의 사람이라도 모두 그의 이름을 말하였다. 죽은 지 4일 됨에 사방에서 부음을 듣고는 모두 탄식하였다. 정사를 함에는 충후함을 숭상하여 이르는 곳에 은혜를 두었다. 빈주와 경주 두 고을의 백성들이 소속된 姜族과 더불어 초상을 그려서 生祠를 세우고 섬겼더니 그가 죽음에 미쳐서 강족의 추장 수 백인이 곡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고 재계한지 삼일에 떠났다. 아들은 넷이니 純佑 純仁 純禮 純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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