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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 선생 연보

황성 2025. 5. 3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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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선생전집부록 권3

 

 

연보(年譜)

 

대명(大明) 무종황제(武宗皇帝) 정덕(正德) 5(1510)-국조(國朝) 중종대왕(中宗大王) 5- 경오년 가을 7월 임인일19 신시(申時)-에 선생이 장성현(長城縣) 대맥동리(大麥洞里)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처음 태어났을 때 모습이 단정하고 기품이 크고 후하였으니, 아버지 참봉공(參奉公)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정덕 6(1511) 신미년-선생의 나이 2세이다.-

혹 질병이 있어 부모가 약을 먹이면 쓰더라도 반드시 삼켰다.

 

정덕 7(1512) 임신년-선생의 나이 3세이다.-

동복(僮僕)에 업혀 갈 적에 가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내고 울었다. 돌아올 적에 반드시 온 길을 가리키며 지름길로 다니지 않게 하였다.

 

정덕 8(1513) 계유년-선생의 나이 4세이다.-

다닐 적에는 반드시 바르게 걸었고, 아무리 급할 때라도 반드시 신을 신고 나갔다. 게다가 글자를 알고 문장을 이해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였다.

 

정덕 9(1514) 갑술년-선생의 나이 5세이다.-

처음 수학(受學)하였다.

참봉공이 주흥사(周興嗣)천자문(千字文)을 구두로 가르쳐 주었는데, 선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대답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자식을 낳았는데 이 모양이니, 꼭 벙어리 같구나. 집안을 일으키긴 글렀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선생이 침을 발라 창호와 벽에 손가락으로 그은 것을 참봉공이 보았는데, 모두 천자문에 있는 글자였으므로 참봉공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배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눈에서 떼지 않았는데, 어떤 때는 종일 밥 먹는 것도 잊었으나 소리 내어 읽은 적은 없었다. 또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연구를 지었는데 우주는 넓고 거친 가운데 대인이 거처한다.[宇宙洪荒大人居]’라는 시구였다.

일찍이 손으로 파를 잡고 바깥 껍질부터 차례로 벗겨서 속심까지 벗긴 뒤에야 그만두었다. 참봉공이 잡된 장난을 한다고 꾸짖자, 대답하기를 끊임없이 생겨나는 이치[生生之理]를 관찰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덕 10(1515) 을해년-선생의 나이 6세이다.-

봄에 어떤 나그네가 선생을 불러 시를 짓게 하였는데, ‘()’ 자를 시제(詩題)로 삼았다. 선생이 운자를 청하고는 곧장 부르는 대로 답하기를,

 

모양은 둥글고 지극히 크며 또 몹시 현묘한데 形圓至大又窮玄

까마득히 아득하게 땅 주위를 둘렀네 浩浩空空繞地邊

덮고 있는 그 안에 만물을 담았으니 覆幬中間容萬物

기나라 사람은 무슨 이유로 무너질까 걱정했나 杞人何爲恐頽連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정덕 11(1516) 병자년-선생의 나이 7세이다.-

참봉공이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을 모아서 선생에게 가르쳐 주니, 선생은 이미 이러한 것을 애호하고 힘써 본받을 줄을 알아서 그냥 간과하려 하지 않았다. 대개 처음 시작하는 단계부터 이끌어 내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정덕 12(1517) 정축일-선생의 나이 8세이다.-

관찰사 조원기(趙元紀)와 더불어 연구를 지었다.

당시에 조공(趙公)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선생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기에 더불어 연구를 지었다. 조공의 연구에 이르기를,

 

완산에서 이틀 밤을 묵고서 信宿完山

이원의 풍경을 실컷 보았네 飽梨園之風景

 

하자, 선생이 화답하기를,

 

풍패에서 오래 머무르며 滯留豊沛

매정의 달빛을 실컷 보았네 饜梅亭之月光

 

하였다. 조공이 또 이르기를,

 

이 아이의 시와 글씨는 兒郞詩筆

두보(杜甫), 백낙천(白樂天), 왕희지(王羲之)와 같다네 杜白王羲輩

 

하니, 선생이 화답하기를,

 

선생의 처신은 先生處事

소신신, 병길, 한연수와 같다네 召吉延壽羣

 

하였다. 또 시를 지었는데,

 

오백 년의 기한이 이미 지났으니 五百年之期已過

하늘은 반드시 성인이 일어나리라 기대할 것이요 天必待聖人之興

수천 년 만에 황하의 물이 맑아졌으니 數千載之河方淸

땅에서는 응당 이름난 호걸이 나오리라 地應生命世之傑

 

라는 시구였다. 또 장편의 시와 부()를 지었는데, 구절마다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에 조공 그 도량을 시험해 보려고 기생들을 시켜 교방(敎坊)으로 안고 가게 하였는데, 음악이 시끌벅적 연주되고 옷차림이 휘황찬란했으나 선생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곡식[]’, ‘[]’, ‘[]’이라고 줄줄이 쓴 다음 선생에게 보여주고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을 말하라.”라고 하자, 선생은 즉시 붓을 집어들고 쓰기를 저는 진현(陳玄)과 관성자(管城子)를 가지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정덕 13(1518) 무인년-선생의 나이 9세이다.-

당시에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낙향하였는데, 선생의 이름을 듣고 찾아와서 만나보고 매우 칭찬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기특한 아이이니, 마땅히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되겠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이때 인종(仁宗)이 탄생한 지 겨우 두세 해였는데 성인처럼 나면서부터 아는 자질을 지녀 훌륭한 덕성이 일찍 드러났기에, 신민들이 모두 후일 요순(堯舜)처럼 다스려 주기를 기대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인하여 임금이 친히 내려준 붓 한 자루를 주니, 선생이 그 뜻을 알고 항상 간직해 두고 상자 속의 보배로 여겼다.

 

정덕 14(1519) 기묘년-선생의 나이 10세이다.-

모재(慕齋) 김선생(金先生 김안국(金安國))을 찾아가 뵙고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보다 앞서 모재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선생의 이름을 듣고 직접 찾아와서 만나보고 매우 칭찬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내 젊은 벗이니, 참으로 삼대(三代)의 인물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찾아가 뵙고 소학을 배우기를 청하니, 강설하고 토론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덕 15(1520) 경진년-선생의 나이 11세이다.-

선생이 소학을 배운 뒤로 한결같이 학문에만 뜻을 두고 과거 공부에는 급급하지 않았다. 늘 잠자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으며, 강송하다가 마음으로 깨닫는 곳에 이르면 문득 스스로 터득한 것을 기뻐하였고 어떤 때는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기까지 하였다.

 

정덕 16(1521) 신사년-선생의 나이 12세이다.-

 

대명(大明)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 1(1522, 중종17) 임오년-선생의 나이 13세이다.-

선생은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성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시경을 가져다 깊이 빠져서 완상하며 읽어 정밀히 통달하는 데 매우 힘썼다. <국풍(國風)>과 같은 부류는 대주(大註)와 소주(小註)를 통틀어 천 번이나 읽었다. 필법에는 또한 그다지 힘을 쓰지 않았지만 엄밀하고 윤택하였으니, 진초(眞草)와 전예(篆隷)는 각각 신묘한 경지에 올랐다.

 

가정 2(1523) 계미년-선생의 나이 14세이다.-

여흥 민씨(驪興尹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따님이다.

 

가정 3(1524) 갑신년-선생의 나이 15세이다.-

아들 종룡(從龍)이 태어났다.

 

가정 4(1525) 을유년-선생의 나이 16세이다.-

 

가정 5(1526) 병술년-선생의 나이 17세이다.-

 

가정 6(1527) 정해년-선생의 나이 18세이다.-

신재(新齋) 최공(崔公)을 찾아가 뵙고 학문을 논하였다.

최공의 이름은 산두(山斗)이니, 학문이 독실한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아직 약관(弱冠)이 되지 않았는데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자서(諸子書), 사책(史策)을 모두 깊이 탐구하고 강습하여 그 대강(大綱)과 대의(大義)를 터득했는데, 반드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정론을 삼가 지키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백가(百家), 온갖 기예에 대해서도 모두 그 설을 두루 통달하여 막히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고 유익한 사우(師友)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이때에 이르러 최공의 명성을 듣고 나아가 강학하니, 최공이 깊이 탄복하며 매양 가을의 맑은 물이나 얼음 병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가정 7(1528) 무자년-선생의 나이 19세이다.-

이해에 선생이 서울에 갔다. 당시에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맡고 있었다. 칠석절(七夕節)에 성균관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선생이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니, 시권(試券)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용재가 남의 손을 빌린 것이라고 자못 의심하여 성균관에 거처하게 한 다음 일곱 개의 시제를 내어 시험하였는데, 선생이 모두 즉시 시권을 작성해 올렸다. 지은 글의 운치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용재가 매우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 가운데 <염부(鹽賦)><영허부(盈虛賦)>는 모두 문집에 보인다.

 

가정 8(1529) 기축년-선생의 나이 20세이다.-

 

가정 9(1530) 경인년-선생의 나이 21세이다.-

 

가정 10(1531) 신묘년-선생의 나이 22세이다.-

성균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가정 11(1532) 임진년-선생의 나이 23세이다.-

조부 훈도공(訓導公)의 상을 당하였다.

 

가정 12(1533) 계사년-선생의 나이 24세이다.-

성균관에서 유학하며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과 함께 강학하였다.

당시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뒤라 선비들이 상심하고 실의에 빠져 도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렸지만, 선생은 퇴계를 한번 만나보고 서로 마음이 깊이 통하여 계속 함께 강학하며 학문을 단련하였으니, 이택(麗澤)의 큰 유익함을 얻을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퇴계가 낙향하자 선생이 시를 지어서 증별(贈別)하였는데 부자(夫子)는 영남의 수재로, 이백(李白)ㆍ두보(杜甫)의 문장과 왕희지(王羲之)ㆍ조맹부(趙孟頫)의 필체를 지녔네.[夫子嶺之秀, 李杜文章王趙筆.]”라는 구절이 있다.

 

가정 13(1534) 갑오년-선생의 나이 25세이다.-

 

가정 14(1535) 을미년-선생의 나이 26세이다.-

서울에서 귀향하였다.

 

가정 15(1536) 병신년-선생의 나이 27세이다.-

여름에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다.

신재(新齋) 최공(崔公)의 부음을 들었다.

선생은 최공과 교의(交誼)가 매우 두터웠으니, 그를 위해 상복을 입었고 기일이 되면 반드시 치재(致齋)하였다.

 

가정 16(1537) 정유년-선생의 나이 28세이다.-

아들 종호(從虎)가 태어났다.

 

가정 17(1538) 무술년-선생의 나이 29세이다.-

여름 4월에 제문을 지어 최신재(崔新齋)를 제사 지냈다. 제문은 문집에 보인다.

 

가정 18(1539) 기해년-선생의 나이 30세이다.-

 

가정 19(1540) 경자년-선생의 나이 31세이다.-

겨울 10월에 별시 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 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분속(分屬)되었다.

 

가정 20(1541) 신축년-선생의 나이 32세이다.-

여름 4월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선생이 함께 선발된 12인과 수계(修禊)를 만들고 호당수계록(湖堂修禊錄)’이라고 이름하였다.

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가정 21(1542) 임인년-선생의 나이 33세이다.-

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으로 승진하였다.

 

가정 22(1543) 계묘 선생의 나이 34세이다.

봄에 모재(慕齋) 김선생(金先生)의 부음을 들었다.

선생은 모재와 교의가 매우 두터웠기에 그를 위해 상복을 입었고 기일에 또한 치재(致齋)하였다. 만사도 지었는데, 문집에 보인다.

여름 4월에 홍문관박사 겸세자시강원설서(弘文館博士兼世子侍講院說書)로 승진하였다. 동궁이 직접 그려 사송(賜送)<묵죽도(墨竹圖)>를 공경히 받았다.

당시 인종이 동궁에서 덕을 수양할 때, 중종이 동궁을 보도하는 직임을 선생에게 전담시켰다. 인종이 선생의 학문과 도덕이 훌륭한 것을 깊이 알고는 성심으로 공경하고 예우하였으며 자주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선생 또한 동궁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 덕이 천고의 제왕 가운데 탁월하니 후일 요순의 통치를 기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극진히 훈도하고 이끌어 주었다. 계우(契遇)가 날로 융숭하였으니, 선생이 숙직하는 방에 있으면 동궁이 더러 직접 방문하여 조용히 문답하고 토론하였는데, 한참 뒤에야 파하곤 하였다. 동궁은 평소 예술적인 재능이 많았는데 남들에게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독 선생에게는 직접 그린 <묵죽도> 한 본()을 주어서 성의를 드러내고, 이어서 선생에게 화축(畫軸)에 시를 쓰게 하였다. 선생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오묘하니 根枝節葉盡精微

돌을 벗 삼은 뜻 그 속에 가득하네 石友精神在範圍

성스럽고 신묘한 솜씨 조물주와 짝하여 始覺聖神侔造化

온 천지와 어긋나지 않음을 비로소 알겠네 一團天地不能違

 

그 뒤에 주자대전(朱子大全)한 질을 하사하였다.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자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를 논하고, 이를 통해 기묘년(1519, 중종14)에 화를 당한 신하들의 원통함을 극렬히 논하였다.

당시에 동궁에 불이 나는 변고가 일어나니, 선생이 개연히 차자를 올려 몸을 수양하고 반성하는 방도를 아뢰었다. 대략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정치를 잘하는 임금은 모두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어진 인재를 가까이해야지만 그들이 임금을 전적으로 보필하여 교화를 도울 수 있고, 반드시 선비의 풍습이 바르게 되어야만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아름답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난 기묘년의 참혹한 화에 대해 조야의 사림이 모두 그들의 억울함을 가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심을 털어놓고 그들의 무고함을 밝혀서 위로는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한 가닥 의심을 풀어 드리고 아래로는 지하에 있는 신하들의 통분을 씻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러 정직한 말과 진심어린 태도로 나서는 이가 있으면 논핵하는 자들이 곧 어리석은 학도의 무리라고 배척하니,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못한 것은 다만 이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국정을 다스리는 틈에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가다듬어 자신을 돌이켜 살피고 매사에 고찰하며 강학할 적에는 기미를 탐구하고 마음을 잡아 굳게 지키는 것에 정성을 다하여, 재변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통렬히 꾸짖으며 날마다 두려워하소서. 가령 마음이 깨끗하고 안팎으로 모두 진실하여 조금의 사심도 섞이지 않게 된다면, 사특함과 바름을 분별하기 어렵지 않고 옳고 그름이 정해진 바가 있어서 야박한 선비의 풍습을 일으키고 해이한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니, 교화가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한 것은 근심거리가 못 될 것입니다.”

당시에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조야에서 여전히 꺼리고 두려워하여 감히 당시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홀로 개연히 이 차자를 올렸으니, 말이 매우 간절했다. 중종이 비록 즉시 윤허하지는 않았지만, 이로부터 신하들의 원통함을 깊이 알아 자못 후회하고 깨닫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가을 8월에 휴가를 청하여 부모를 뵈러 갔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하려는 뜻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쫓겨나고 김 문경(金文敬)이 문원(李文元)과 같은 어진 이들이 차츰 등용되니, 양의 기운이 다시 회복되는 조짐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척리(戚里)들이 서로 다투니, 시국이 도리어 근심스러워졌다. 선생이 홀로 늘 깊이 염려하다가 밝게 깨닫고는, 마침내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게 해 주기를 간절히 청하여 낙향하니,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겨울 12월에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춘추관의 직임을 계속 맡았다.

선생은 양친이 매우 연로하다는 이유로 걸양(乞養)하였으므로, 마침내 이러한 명이 내린 것이다.

 

가정 23(1544) 갑진년-선생의 나이 35세이다.-

겨울 11월에 중종대왕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정 24(1545)-인종대왕(仁宗大王) 1- 을사년-선생의 나이 36세이다.-

여름 4월에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가 곧장 임소로 돌아갔다.

명나라의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이 와서 국상에 조문하였다. 조정에서 아뢰어 선생을 제술관으로 삼았으니, 마침내 부름에 나아간 것이다. 당시에 인종이 새로 즉위한 때라 중외에서 태평 시대가 오기를 희망하였기에 모두 선생을 만류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보좌하고 인도하게 하고자 하였지만, 선생은 이미 기미를 알아차리는 데 몹시 신통하였으므로 머물려 하지 않았다. 간혹 인종이 병으로 몸져누우면 선생이 약을 의논하는데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내의원에서는 선생의 직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부모의 병을 핑계로 임소로 돌아가기를 굳게 청하였다.

가을 7월에 인종대왕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생이 인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실성하여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마음의 병이 발작한 듯이 혼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인사(人事)를 모두 폐하고 다시는 벼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정 25(1546)-명종대왕(明宗大王) 1- 병오년-선생의 나이 37세이다.-

여름 6월에 <효경간오발(孝經刊誤跋)>을 지었다.

선생이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재직할 때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이 고을을 지나가다가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효경간오(孝經刊誤)한 질을 보내 주니, 선생이 기뻐하여 직접 베껴 썼다. 이때에 이르러 그 끝에 발문을 써서 그 뜻을 넓혀 후대의 학자에게 전수해 준 것이다.발문은 문집에 보인다.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온 뒤로 강학에 전념하였다. 학도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었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小學)을 읽고 다음으로 대학(大學)을 읽게 하여 한결같이 주 문공이 만들어 놓은 법을 따랐다. 두 아들에게도 소학10년이나 가르치면서 다른 책으로 바꾸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산에 들어가 통곡하였으니, 인종의 첫 기일이었다.

선생은 을사년(1545, 명종1) 이후로 매양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때가 되면 책을 덮고 손님을 거절하고서 시름에 겨운 채 즐거워하지 않았고 일찍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71일 효릉(孝陵 인종)의 기일이 되면, 술을 가지고 집 남쪽 난산(卵山)에 들어가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한 번씩 곡하며 밤새 통곡하다가 돌아왔으니, 종신토록 이와 같이 하며 한 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또 일찍이 <유소사(有所思)>란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연세 서른 향해 가실 제 君年方向立

내 나이는 서른여섯 무렵이었네 我年欲三紀

새로 만난 즐거움 다 누리지 못한 채 新歡未渠央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영영 이별했네 一別如絃矢

내 마음은 변치 않을지언정 我心不可轉

세상일 동해로 흐르는 물처럼 돌이킬 수 없네 世事東流水

젊은 나이에 해로할 짝을 잃고는 盛年失偕老

눈은 침침하고 터럭과 이빨도 쇠했네 目昏衰髪齒

덧없이 몇 년을 살았나 泯泯幾春秋

지금까지 죽지 못한 신세일세 至今猶未死

백주는 저 황하 가운데 있고 柏舟在中河

남산에는 고사리가 자라네 南山薇作止

도리어 부러운 건 주나라의 왕비가 却羨周王妃

이별하고 권이를 노래함일세 生離歌卷耳

 

그 처량하고 격렬한 심정을 시구 내에 드러낸 것이 이와 같았다.

 

가정 26(1547) 정미년-선생의 나이 38세이다.-

봄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를 지어 문인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었으니 天地中間有二人

공자(孔子)는 원기이고 주자(朱子)는 진수일세 仲尼元氣紫陽眞

마음 가라앉히고 갈랫길에서 미혹되지 말아 潛心勿向他岐惑

노쇠하여 병든 이 몸을 위로해 주게 慰此摧頹一病身

 

선생은 대개 문자가 생긴 이후로 성인들이 제위에 올랐는데 세상이 쇠미해졌을 적에 공자가 없었다면 성인들의 도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공자 이후로 현인들이 전통을 이었는데 도가 어두워졌을 적에 주자가 없었다면 공자의 도가 밝아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공자와 주자의 사업과 공렬이 천지 사이에 찬란히 빛나는 까닭으로, 여러 성인과 현인도 이들을 능가할 수 없기에 시로 드러내어 후학들을 계도한 것이니, 선생의 식견과 법도는 이 시를 통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시를 지어 이지남(李至男)에게 주었다.

이지남이 선생을 찾아와 배운 지 10년 되었을 때 초사(楚辭)를 배우고 싶어 하였다. 선생이 다 읽기 전에 갑자기 비분강개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시를 지어서 그에게 주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문에 걸맞는 훌륭한 자제와 蘭猗玉栗稱家庭

대숲 밖 초가집에서 초사를 읽네 竹外窮簷講楚經

굳이 풍아의 말단에 마음을 두지 마오 馳騁不須風雅末

시 삼백 편이 모두 화평하네 周詩三百儘和平

 

대개 선생은 을사년(1545, 명종1) 이후로 평소에도 울적해하며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곤궁한 사람 같았으니, 시를 읊는 사이에 그 심경을 드러낸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가정 27(1548) 무신년-선생의 나이 39세이다.-

순창(淳昌) 점암촌(鮎巖村)에 우거하였다.

점암에 초당(草堂)을 짓고 훈몽재(訓蒙齋)’라는 편액을 걸고서 날마다 생도들과 강학하고 교유하며 유연히 세속을 벗어나려는 생각이 있었다.어느 날 밤에 생도 조희문(趙希文)양자징(梁子澂)이 매화 가지를 꺾어 와서 선생을 모시고 술을 마셨다. 양자징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풀 하나 나무 하나에 대해서도 모두 궁구하여 읊으시니, 사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조희문이 말하기를 그대는 선생님에 대해 모르는구나.”라고 하고는 즉석에서 읊기를 사물에 마음을 빼앗긴 것 본성이 아니니, 술을 마시며 다만 회포를 푸는 것이로다.[玩物非天性, 銜杯只寄懷.]”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조랑(趙郞 조희문)은 나를 아는구나.”라고 하고, 인하여 시구를 이어서 읊기를 매화꽃 등잔 아래 술을 마시니, 취한 듯 또 거니는 듯 하네.[梅花燈下飮, 如醉又如俳.]”라고 하였다. 선생이 시와 술에 마음을 둔 것은 참으로 사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니,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가정 28(1549) 기유년-선생의 나이 40세이다.-

2월에 <대학강의발(大學講義跋)>을 지었다.

선생이 일찍이 주자대전(朱子大全)중에서 <대학강의(大學講義)>를 보고는 말의 뜻이 명백하고 조리가 통창(通暢)해서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여 임금의 뜻을 감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뜻을 드러내어 그 글 아래에 발문을 지었다.발문은 문집에 보인다.

여름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부친 참봉공(參奉公)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이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허약해져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장사를 마칠 때까지 반드시 모두 친히 예를 행하여 힘써 인정과 예법을 애써 다하였다. 12월에 집 서쪽 원당동(願堂洞)에 장사지냈다.

 

가정 29(1550) 경술년-선생의 나이 41세이다.-

선생이 일찍이 묘사(墓舍)의 거처하는 방에 담재(湛齋)’라고 편액하고 그대로 자호로 삼았다. 연대가 자세하지 않으므로 일단 이곳에 기록한다.

 

가정 30(1551) 신해년-선생의 나이 42세이다.-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전 부친상을 치를 때와 마찬가지로 슬퍼하면서도 인정과 예법을 다하였다. 9월에 참봉공의 묘소 왼쪽에 합장하였다.

 

가정 31(1552) 임자년-선생의 나이 43세이다.-

 

가정 32(1553) 계축년-선생의 나이 44세이다.-

가을 9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 소명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전문(箋文)을 올려서 병으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전문을 올린 뒤에 상이 하교하기를 전문의 말이 매우 간절하다. 그러나 누군들 숙환이 없겠는가. 군주를 섬기는 대의는 또한 소홀히 수 없으니, 병을 조리하고 나서 올라오라.”라고 하였다. 선생이 다시 병으로 괴로운 실상을 힘써 아뢰고는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전문은 문집에 보인다.

 

가정 33(1554) 갑인년-선생의 나이 45세이다.-

가을 9월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전문을 올려서 힘써 사양하였다.

상이 간곡한 말로 교지를 내려서 병으로 사직하고 올라오지 않으니, 나는 너무나 서운하다.”라는 뜻을 거듭 밝혔다.전문은 전하지 않는다.

겨울 10월에 음식을 지급한다는 명을 받들었는데, 전문을 올려서 사양하였다.

당시에 성상이 특별히 본도에 명하여 음식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선생이 전문을 올려서 사양하였다. 다시 안심하고 조리하며 천천히 명을 받으라는 교지를 받들었다.전문은 문집에 보인다.

 

가정 34(1555) 을묘년-선생의 나이 46세이다.-

 

가정 35(1556) 병진년-선생의 나이 47세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주역을 읽고 지은 시에 차운하였다.

당시에 화담은 심학(心學)으로 당대에 종주가 되었다. 일찍이 <주역>을 읽고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과 이가 작용 속에 숨어 형체보다 앞서 존재하니 坎离藏用有形先

그것이 유행해서야 도가 비로소 전해지네 到得流行道始傳

복희씨의 팔괘는 진상을 대략 그린 것이고 羲畫略摸眞底象

주역에서는 그림자 속에서 하늘을 말하였네 周經且說影中天

사물의 이치 연구하여 이제야 천지의 조화 깨닫고 硏從物上方知化

근원을 찾다보니 비로소 현묘함을 깨우치네 搜自源頭始破玄

글로는 다 말할 수 없고 말 밖에 뜻이 있으니 書不盡言言外意

공자가 홀로 가죽끈 끊은 것 아니라네 仲尼非獨絶韋編

 

선생이 이 시를 보고 말하기를 성인의 말씀은 바로 천지의 도이니, 그림자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시에 차운하기를,

 

혼연한 전체가 만물보다 앞서 생성되었으니 渾然全體有生先

대화가 유행하여 만물과 함께 이치를 전하였네 大化流行物共傳

복희씨는 괘를 그어 변화를 밝혔고 羲畫推移明變化

주역이 이를 분석해 인사와 천리를 징험했네 周經剖析驗人天

공부가 지극한 곳에서 바야흐로 신묘함을 깨닫고 工夫盡處方知妙

인식이 깊어질 때 다시 현묘한 이치 깨우치네 體認深時更覺玄

상을 세우고 말을 붙여 말과 뜻 다했으니 立象繫辭言意盡

공자께서 주역탐독하신 것 떠올리네 憶曾將聖絶韋編

 

또 한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부하는 차례 선후가 있다고 하지만 次第工夫有後先

공문에서는 무얼 먼저 가르치는가라고 했다네 孔門曾說孰先傳

참된 앎은 일상 행동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眞知不外常行地

아래부터 배워 가면 위로 천리를 깨닫기 마련이네 下學無非上達天

확실한 성인의 말씀 믿지 않은 채 未信聖人言的的

도리어 배우는 자의 의혹만 깊어질까 걱정이네 翻愁學者惑玄玄

본원의 정미한 곳을 향해 곧장 가더라도 本源徑造精微處

서책을 보지 않는 것은 병폐가 될 따름이네 末弊其如廢簡編

 

대개 화담이 학자를 계도하는 방식은, 기초적인 배움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돈오(頓悟)에만 힘쓰고 첩경(捷徑)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이 우려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깊이 걱정하다가 마침내 차운하여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가정 36(1557) 정사년-선생의 나이 48세이다.-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지었다.

선생은 태극도설(太極圖說)서명(西銘)등의 책을 오래도록 즐겨 공부하여 천 번씩이나 읽었다. 이때에 이르러 주역관상편을 짓고 서명사천도를 만들었다. 또 배우는 자에게 써서 보이며 말하기를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태극도설은 도리가 정미하고 문장이 간략하면서 뜻은 넉넉하다. 장자(張子 장재(張載))서명은 규모가 광활하면서도 내용이 범범하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았다. 만약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명하다면 먼저 태극도설을 공부하고, 그렇지 않다면 우선 서명을 이해한 다음 태극도설을 공부해야 한다. 태극도설은 덕성의 본령이고 서명은 학문의 기강이니, 요컨대 하나라도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은 일실되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가정 37(1558) 무오년-선생의 나이 49세이다.-

겨울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의 그릇됨에 대해 강론하였다.

당시에 고봉이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방문하여 태극도설에 대해 강론하였다. 일재는 태극음양(太極陰陽)을 일물(一物)로 여겼는데, 고봉은 이 설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종일토록 논란하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고봉이 선생을 찾아와 뵙고는 그 논란의 가부에 대해 질정하였다. 선생은 고봉의 견해가 옳다고 여기고는 종일 강론하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마쳤다.

 

가정 38(1559) 기미년-선생의 나이 50세이다.-

이일재(李一齋)에게 편지를 보내 태극음양일물설의 그릇됨에 대해 논하였다.

일재가 고봉에게 편지를 보내 태극음양일물설의 뜻을 극력 논하였으니, 선생에게 보내서 고봉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선생이 그 편지를 보고나서 일재에게 짧은 서간을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기군(奇君)에게 준 편지에 대해 감히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개 이()와 기()가 혼합되어 천지 사이에 차 있는 것이 모두 그 속에서 나오며 각각 모두 갖추어지게 되니, 태극이 음양에서 떠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와 기()의 구분에는 한계가 없을 수 없으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이라고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태극이 음양을 타는 것이 마치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으니,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겨울에 기고봉(奇高峯)에게 편지를 보내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대해 강론하였다.

당시에 고봉이 고향으로 물러나 거하면서 매번 선생에게 나아와 의리(義理)에 관해 토론하였는데, 퇴계(退溪)의 사단칠정설과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 깊은 의문이 생겨서 선생을 찾아와 질정한 것이다. 선생이 그를 위해 분석하고 논변하였는데, 매우 명확하고 정밀하게 가르쳐 주었다. 고봉이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 이와 같았기에,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고봉은 퇴계와 사단칠정설과 이기호발설의 그릇됨에 대해 강론하였다. 선생의 뜻을 많이 기술하여 변론한 것이 거의 수만 자에 이르니, 세상에 전하는 퇴계와 고봉이 사단칠정설에 관해 주고받은 편지가 바로 이것이다.

나정암(羅整庵)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논하였다.

나정암의 이름은 흠순(欽順)이다. 그가 저술한 곤지기(困知記)도심(道心)은 성()이고, 인심(人心)은 정()이다. 몹시 정밀한 체()는 볼 수 없으므로 은미하다[]’고 하고, 몹시 변동하는 용()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위태롭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힘써 그 설을 주장하여 도심은 적막한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인심은 느껴지면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한다.”라고 하니, 선생이 매우 그릇되게 여겨 성인이 이른 바 인심과 도심은 대개 모두 움직이는 곳을 지목해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퇴계와 고봉이 모두 선생의 설을 따라 노수신의 설을 힘써 공격하였는데, 선생의 전론(全論)은 일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가정 39(1560) 경신년-선생의 나이 51세이다.-

1월 경오일-16-에 정침에서 별세하였다.

3일 전 무진일에 선생의 기운이 편치 못하였는데, 약물을 올리자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상원(上元)이니, 희생과 술을 공경히 마련하라.”라고 하고, 자녀들에게 사당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기사일에 선생은 병든 몸으로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꼿꼿이 앉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인하여 명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을사년(1545, 명종1) 이후의 관작은 쓰지 말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경오일에 병이 위독해지자 자리를 바르게 정돈하고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선생이 어렸을 적에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일찍이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기이한 아이 중에 제 명에 편안히 죽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아이만 제 명에 편안히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증명되었다.

3월 계유일(7)에 장성현(長城縣) 대맥동(大麥洞) 원당산(願堂山)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하서선생전집 부록 권4

 

연보(年譜)

 

가정 43(1564, 명종19) 갑자년

옥과현(玉果縣)의 유생들이 영귀정사(詠歸亭祠)를 지었다.

제생들이 선생이 남긴 은택을 잊지 못해서 이 사당을 창건한 것이다.

 

목종황제(穆宗皇帝) 융경(隆慶) 4(1570)-선조대왕(宣祖大王) 3- 경오년

순창(淳昌)의 유생들이 화산사(華山祠)를 지었다.

화산은 선생이 오가며 노닐던 곳이다.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18(1584, 선조17) 경인년

장성(長城)의 기산(岐山)에 서원을 세웠다.

문인 변성온(卞成溫) 등이 창건하였다.

 

의종황제(毅宗皇帝) 숭정(崇禎) 갑신 후 15(1658)-효종대왕(孝宗大王) 9- 무술년

전라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서원에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19(1662)-현종대왕(顯宗大王) 3- 임인년

필암서원(筆巖書院)에 사액을 내리고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25(1668) 무신년

 

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에 특별히 증직(贈職)하였다.

연신(筵臣)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더 포장(褒獎)해서 증직해 줄 것을 청하니, 마침내 이러한 명을 내렸다.

 

26(1669) 기유년

가을에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은 것[道德博聞]()’이라 하고, 관대하고 화락하며 제 명에 편안히 죽은 것[寬樂令終]()’이라고 한다.

 

29(1672) 임자년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완성되었다.

우암(尤庵)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32(1675)-숙종대왕(肅宗大王) 1- 을묘년

묘표(墓表)가 완성되었다.

문곡(文谷)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지었다.

 

128(1771)-영종대왕(英宗大王) 47- 신묘년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 등이 상소하여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4(1777)-정종대왕(正宗大王) 1- 정유년

묘지명(墓誌銘)이 완성되었다.

본암(本庵) 김종후(金鍾厚)가 지었다.

 

143(1786) 병오년

3월에 상이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당시에 상이 희릉(禧陵), 효릉(孝陵)을 배알하고 하교하기를 고 유신(儒臣) 김인후(金麟厚)와 인종(仁宗)이 서로 만나 뜻이 맞은 것은 천고에 없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본릉(本陵)을 배알한 뒤에 어찌 조정의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해당 조()로 하여금 날짜를 잡아 치제(致祭)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가을 8월에 팔도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오도(吾道)가 동쪽에 있고 인문(人文)이 크게 일어나 상하로 수백 년 동안에 참된 선비가 배출되어 옛 성인의 학통을 이어 후학의 길을 열고 왕가의 밝은 다스림을 도왔으니, 그 공이 크면 보답하는 것이 융숭하고 그 덕이 성대하면 존숭하는 것이 지극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한 것이 전후로 줄을 이었습니다. 사문(斯文)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고 치국의 도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빛났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예전(禮典)이 중요한 이상 일시에 나란히 시행하기 어렵고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운수가 있으니, 또한 혹 후대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는 한 시대의 유종(儒宗)으로서 백대의 사표(師表)가 되지만 아직도 제향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성스러운 조정에 흠결이 되는 일입니다.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식견을 지닌 말학(末學)으로서 대현의 경지에 대해서 도리어 어찌 협소하고 천박한 견식으로 엿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인에게서 얻은 논찬이 있으니, 그 대략을 들어서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김인후는 청명하고 온수(溫粹)한 자품(資品)에 뛰어나고 시원한 기상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이 적고 걸음걸이가 단정하였으며, 외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미 생리(生理)를 묵묵히 관찰하였으니, 천체(天體)를 읊은 시와 명덕(明德)을 형상한 작품은 모두 스승에게 나아가기 이전에 지은 것으로 스스로 대의를 터득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혹 안자(顔子)의 총명과 예지에 가깝다고 하였으니, 이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난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만년에는 더욱 진보하였습니다. 소학(小學)대학(大學)을 학문의 처음과 끝으로 삼아 종신토록 익혀 마치 자기의 말을 되뇌듯이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경(詩經), 주역(周易)에 힘썼으며, 의리가 정밀하고 심오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규모가 광대한 <서명(西銘)>까지도 또한 일찍이 완미하고 사색하기를 마지않아 배우는 자는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알았어도 마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여겼고, 선택함이 이미 정밀하였지만 생각하는 것을 더욱 부지런하였으니, 이는 학문의 독실함입니다.

조예(造詣)로 말하면 경()으로 잡아 지키고 의()로써 헤아려 마음에 체득하고 자신에게 돌이켜, 덕이 날로 진보하고 학업이 날로 넓어져서 내면과 외면이 간격이 없고 동정(動靜)이 한결같았으니, 대중지정(大中至正)의 규모가 탁월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의 유자들은 모두 이치를 밝히는 학문에 전적으로 마음을 쏟되, 비록 정미한 곳에 대해 혹 다 밝히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김인후는 묵묵히 도의 묘리에 계합하고 대원(大原)을 꿰뚫어 보아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하나의 물건으로 삼고 인심과 도심을 체()와 용()으로 삼았으니, 한마디 말로 분석한 것이 명백하고 정확하였습니다.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은 일찍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변에 대해 질의한 바가 많아 그의 인증을 받았으며, 뒤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란한 것이 거의 수만 자에 이르렀는데, 요컨대 모두 나아가 바로잡는 뜻에 근본한 것입니다. 이황도 일찍이 그의 도학에 관한 문자를 보고 식견이 정밀한 것을 매우 공경하였습니다. 평소의 의론은 대체적으로 신기한 곳에 미혹되지 않고 교요(繳繞)에 어지럽지 않았으니, 평정(平正)하고 알기 쉬우며 쳐도 깨뜨릴 수 없을 만큼 의리가 명확하였지만 또한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 않고 한결같이 주자(朱子)에게서 절충하였습니다. 대개 양명(陽明)의 무리가 일어난 뒤로 강서(江西)의 한 맥이 다시 중국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선비 중에 비록 주자의 도를 배워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마치 해가 중천에 뜬 것처럼 김인후만 주자를 존신하여 당시에 주자가 공자와 맹자의 도통을 곧장 이었다고 생각하여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구에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공자가 원기라면 주자는 진수일세[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식견과 지취가 뛰어남을 알 수 있으니, 사도(斯道)를 크게 도운 공로가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또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에 밝아 가례(家禮)의 빠진 문장과 의심스러운 곳을 수정하였는데, 고증하고 근거를 댄 것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이 글에서 많이 취하여 예서(禮書)를 고증하였습니다.

그의 출처에 대해 말하면, 인묘(仁廟)께서 동궁에서 덕을 기르시던 때부터 시강(侍講)한 것이 이미 오래되어 은혜로운 대우가 매우 융숭하였습니다. 숙직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 토론을 벌이셨고 묵죽(墨竹)을 손수 그려서 하사하셨으니, 덕이 있는 사람과 서로 함께하는 성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제현(諸賢)의 원통함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지만 김인후는 홍문관의 직임을 맡았을 때 홀로 차자를 올려 말하였는데 말뜻이 아주 적절(適切)하여 중묘(中廟)께서 자못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인묘 초년에 맨 먼저 신원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사람들은 당일의 한마디 말이 대개 그 기미를 드러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바야흐로 조정에서 믿고 의지하였지만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청하였으니, 이미 물러나 은거하려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인묘께서 승하하시자 문을 닫아걸고 일을 사절하고 홀로 애통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 오백 년만에 성인(聖人)이 나타나고 그에 응하여 명유(名儒)가 적절한 시기에 나왔는데 불행하게도 백성이 복이 없어 끝내 명량(明良)의 갱재가(賡載歌)를 부르는 아름다움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고에 한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사대부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사양하고 받는 의리는 실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되는데, 김인후는 기미를 밝게 살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를 감추어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 밝은 지혜와 통달한 식견, 맑은 풍모와 큰 절개를 돌아보면 한 줄로 설명할 수 없지만 깊이 나아가고 두텁게 쌓아 발현된 것은 실로 도학의 바름에 근원하였습니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윤리를 바로잡고 은의(恩義)를 돈독히 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지행(知行)을 두루 하고 내외가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시를 지으면 또한 순수하여 잡됨이 없이 한결같이 정도에서 나왔으니, 모두 성정을 다스리고 도덕을 함양하기 위한 것으로 참으로 인의를 지닌 자의 말이었습니다. 그 위의(威儀)를 보면 엄숙하여 공경할 만하였고, 사기(辭氣)를 접하면 온후하여 즐거워할 만하였습니다. 흉중이 드넓으면서도 범접할 수 없이 우뚝한 지조가 있었고, 심지(心地)가 엄밀하면서도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뜰의 무성한 풀을 제거하지 않는 지취를 겸하였으니, 거의 중화(中和)를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휩쓸리지 않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이 때문에 풍문을 들은 자는 진심으로 감복하고 덕을 본 자는 심취하였습니다.

젊어서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을 섬겼는데, 김안국이 그를 소우(少友)라고 불렀으며, 만년의 절개를 보고 매번 삼대(三代)의 인물이라고 일컬을 정도였습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또한 그의 출처의 올바름은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다고 일컬었으며, 심지어 맑은 물의 연꽃이요,[淸水芙蓉] 맑은 바람에 갠 달[光風霽月]’이라고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은 더욱더 경모하여 <하서김선생신도비명(河西金先生神道碑銘>에서 본조 인물의 도학, 절의, 문장은 각각 차등이 있어서 모두를 겸하여 치우치지 않은 이가 거의 드문데,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배출시킨 하서 김 선생만은 예외인 것 같다. 하서(河西)는 바로 김인후의 호이다.’라고 하였고, 끝에 또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어서 이 이름이 실정에 걸맞음을 보였으니, 천년이 지난 뒤에 누가 이 평가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 세대의 고금(古今)이나 사람의 현우를 논할 것 없이 모두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보니, 무릇 선생의 발길이 닿은 곳에 또한 모두 사당을 지어 제향합니다. 현묘(顯廟) 필암(筆巖)’이라는 사액(賜額)을 특별히 내리셨으니, 현인을 숭상하는 일이 성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림(儒林)에서 경모하는 마음은 오히려 융숭하게 보답하는 것이 미진한 점을 아쉬워하였습니다. 지금 신들이 아뢴 것은 선현들의 확정된 의견을 서술한 것이지 후생의 사사로운 견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백대가 지나도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문묘에 배향하는 전례(典禮)는 이런 사람을 놔두고 그 누구를 선발하겠습니까. 다만 연대가 조금 멀어 절로 내버려두게 되었습니다. 근세 이래로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청한 것도 이미 여러 번이었지만 그때마다 사정이 변하는 때를 만나 한 번도 성상께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앞서 신이 말한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운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뒤로 정령(政令)을 베푸는 것이 언제나 하늘의 법칙에 합치하였고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것에 더욱 성상의 뜻을 지극히 하셨습니다. 무릇 열성조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대부분 정비하였으니, 오랫동안 펴지지 못한 온 세상의 공의(公議)가 펴지는 것이 오늘날에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묻는 성대한 도량을 넓히고 덕이 높은 이에게 보답하는 일을 진념하시어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속히 선정신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는 예를 거행함으로써 밝은 시대의 아름다운 규범을 다하여 선비들의 큰 바람에 부응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사문에 매우 다행이고 세도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문정공의 조예는 내가 일찍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바이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큰 전례이다. 몇백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지금 어찌 가벼이 의논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물러나 학업에 정진하라.”

하였다.

 

153(1796, 정조20) 병진년 여름 방외(方外) 유생 김무순(金懋淳)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다.

신묘년(1771, 영조47) 양학연(梁學淵) 등이 상소한 뒤로부터 공의(公議)가 더욱 답답하게 여겨 팔도의 서울과 지방 유생들이 잇달아 상소하여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이 6, 7차례에 이르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해 여름에 팔도 유생 이명채(李明彩) 등이 상소하여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전에 선정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는 의리의 큰 근원을 통찰하고 홀로 그 종지(宗旨)를 터득하였다. 그가 우뚝한 충심과 아름다운 절의를 이따금 시문(詩文)으로 표현했던 것은 대단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옛사람이 국조 인물의 도학(道學), 절의(節義), 문장(文章)은 각각 차등이 있어서 모두를 겸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사람은 선생이 거의 그에 가까웠다고 논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그대들이 상소를 세 차례나 올리면서도 문정공을 맨 앞에 내세우지 않았으니, 이는 유자(有子)가 성인과 닮았다고 하면서도 그를 십철과 함께 종사하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초야의 선비와 더불어 강구해 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무순(金懋淳) 등이 또 상소하여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선정 문정공이 바로 정맥(正脈)을 찾고 앞장서 여러 현자들을 흥기시켜서 문순공(文純公 이황)처럼 참되게 학문을 쌓고 실천한 사람도 그에게 나아가 질정을 받아 의문을 해결할 정도였으니, 문순공이 그의 도학은 견줄 대상이 없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격언이다. 문묘에 종사하자는 그대들의 요청에 대해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하지만 상소에 대해 태학(太學)에서 근실(謹悉)’을 써 주지 않아 지금에야 상소가 올라오게 되었으니, 상황을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들이 일전에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린 뒤에 이 글을 마련했다고 여길 것이다. 태학의 일은 온당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가을 7월에 팔도 유생 채홍신(蔡弘臣) 등이 상소하여 선생과 조 문열(趙文烈), 김 문경(金文敬)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문묘에 종사하는 데에 김 문정공과 같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 절의(節義)와 기국(器局)으로도 참여하지 못한다면 사문(斯文)에 어떠하겠으며, 공론(公論)에 어떠하겠는가. 조 문열공의 경우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렵다. 또 김 문경공의 경우 부자(父子)를 모두 종사하는 것이 상고할 데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전의 비답에서 충분히 다 설명하였다. 그대들은 물러나 학업에 정진하라.”

하였다.

 

8월에 서울과 지방의 유생 이규남(李奎南) 등이 상소하여 선생과 조 문열(趙文烈)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다.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이 천지의 위대함을 본받아 세도의 교화를 배양하는 것은 현인을 구하여 함께 다스린다고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현인을 구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현자로 하여금 살아서는 존중을 받게 하고 죽어서는 융숭하게 보답받게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현인의 실제에 대해서 한번 그 대강을 들어서 논하자면 크게 도덕과 문장, 절의와 공적이라 하였으니, 대저 이른바 존숭하여 보답하는 은전은 실로 문묘에 배향하여 지극히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문묘에 배향된 109명이 살아서는 명철한 군주에게 존중을 받고 죽어서는 성세(聖世)에 융숭하게 보답을 받은 것은 백성에게 공이 있고 후세에 은택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도를 지니고 이 학문을 전하여 빛을 발하고 광대함과 위대함이 109명의 현인과 더불어 아름다움과 영광이 엇비슷하여 이미 존중하는 예우를 명철한 군주에게 받고도 성세에 융숭하게 보답하는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신들이 지난번에 배향하기를 청했던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세 선정신은 특별히 가장 드러난 자일 따름입니다.

공론이 일어난 것이 대개 전후로 100년이 되었는데, 신들이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외람되이 번거롭게 우러러 청하는 것은 몽매한 후학인 신들이 처음으로 꺼내는 말이 아니라 바로 학문이 훌륭한 선배들이 이미 정한 의론입니다. 공론이 갈수록 더욱 답답하게 여기니 일이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리는 자질을 타고나시고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을 지녀 도()의 요체를 꿰뚫어 보시고 성리(性理)의 근원을 탐구하여 요() 임금과 순() 임금 같은 성인으로서 군사(君師)의 지위에 올라 공이 틈이 없이 환히 밝아져 문명(文明)의 운세를 여셨습니다. 그런데 세 선정신의 고명하고 순정하며 독실하고 적확하여 천륜과 인륜이 찬란하게 갖추어진 학문의 깊이에 대해서 반드시 묵묵히 계합하고 홀로 깨달은 바가 있으실 것입니다. 신들이 처음 호소할 때 삼가 서로 경하하기를 배향하는 중대한 전례(典禮)는 옛날에도 어렵게 여겼다. 그러나 어진 이를 좋아하고 덕 있는 이를 숭상하는 우리 전하의 정성으로 신들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도덕과 문장, 절의와 공이 있는 109명의 현인의 반열에 오르는 성대한 의식을 베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를 올려 네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는데도 성상께서 들어주실 기약이 아득하여 아직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나라의 통일된 공론이 펴지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정성이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 세 선정은 하늘의 이치를 알고 인륜을 바로잡는 공업과 땅이 만물을 지고 바다가 온갖 냇물을 받아들이는 문덕을 갖추었으니, 그 의리는 해와 별처럼 빛나고 쇠와 돌을 뚫으며 그 공은 정자(程子)의 학문으로 거슬러 올라가 학문의 빗장을 열었습니다. ()’ 자로 시종을 관통하고 온갖 이치를 포괄하였으니 참으로 고명함을 다하고 광대함을 지극히 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 오륜 가운데 군신과 부자 관계가 가장 큰데, 산속에서 일곱 달 동안 통곡하고 집안에서 오지(五止)의 훈계를 읊조렸으니, 아직도 지사(志士)와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한탄스러워 다하지 않는 슬픔과 사무침이 있게 합니다.

김집(金集)의 경우는 더욱 위대합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을 스승으로 삼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아버지로 두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과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을 제자로 삼아 그 학문의 연원을 이어받아 후학에게 전해 주었으니 천고 이래로 견줄 사람이 드뭅니다. 그렇다면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바로 집안 대대로 전하는 유업(遺業)이니 누가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부자를 모두 배향하는 데에 근거할 만한 역대 기록이 없는 것은 일의 체모를 중시하고 예절을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달렸습니다. 지난번에 성상의 비답을 받들었고 또 유현(儒賢)과 주고받은 편지도 있습니다. 대저 법을 세우고 예를 제정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만 한 분이 없는데 주()나라와 한()나라 때부터 송()나라와 명()나라를 거쳐 지금 훌륭한 성상께서 다스리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 동안 부자가 모두 어진 경우가 또한 어찌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한 번도 함께 배향하는 것을 행한 적이 있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어렵게 여기고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을 나란히 배향하는 것을 심사숙고해야 할 단서로 여긴다면 사림으로서는 비록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문경공에게는 더욱 광영이 될 것이니, 이는 굳이 제향하는 것과 제향하지 않는 것에 경중을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정에 있는 사대부와 재야의 유현들에게 널리 물으시어 막중한 전례(典禮)가 매우 합당하게 되도록 하시고 문정공과 문열공 두 선정신을 종사해 달라는 청에 대해 속히 여망(輿望)을 윤허해 주소서. 그리해 주시면 사문(斯文)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들이 문경 부자를 아울러 배향하는 것을 심사숙고해야 할 단서로 여긴다면 문경공에게 더욱 광영이 된다고 하였고, 또 유현(儒賢)과 주고받은 편지를 끌어다 증거를 댔으니, 사림의 공론이 미리 도모하지 않고도 합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나도 이견이 없다. 문정공과 문열공을 종사해 달라는 청이 어찌 두 선현에 대해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우리 왕조에 들어선 이후 맨 먼저 성리(性理)를 천명하여 비로소 큰 근원을 보고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중니(仲尼)와 자양(紫陽 주희(朱熹)) 두 사람이 있는 줄을 알도록 한 것은 문정공(文靖公) 한 사람뿐이었다. 비록 오현(五賢) 이하 종사된 유현들이 지금 세상에 살아 있더라도 모두 필시 문정공에게 양보하였을 것이다. 추가로 배향하는 전례를 거행하고자 한다면 단연코 문정공 한 사람만을 거론해야 하니, 그런 뒤라야 사문(斯文)에 공이 있고 후학에게 혜택을 주었으면서도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크나큰 공적과 은혜에 대해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자나 깨나 고심하며 일념으로 부지런히 하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修道之爲敎]’라는 한 구절이니, 어찌 부덕한 내가 혹시라도 ()을 행해야 할 때에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라는 의리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스승이 있는 곳에 도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의 말을 도에서 멀리 떨어진 말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초야에서 덕을 숨기고 살아가는 선비들을 다시 찾아가 이 비답의 뜻을 가지고 그들과 더불어 자세히 따져 보고 깊이 연구함으로써 문정 한 사람만 거론하는 것이 외람되지 않고 지나치지 않을 방도를 찾아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관학 유생(館學儒生) 심내영(沈來永)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선생을 배향하기를 청하였다.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위대하신 상제께서 충()을 내려주고 성()으로 명하였으며, 위대하신 상제께서 법칙을 세워 성을 따라 도를 닦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하에 있는 도는 하늘이 항상 위에서 운행하는 것과 같지만 오직 사람에게 의탁한 것은 소멸함과 생성함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행해지는 것은 드러남과 묻힘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은 아래에 있는 현자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저 성인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다스림에 만물이 다 쳐다보는지라 바람에 움직이고 비에 적셔지는 가운데 자신을 갈고닦아 타인의 재능을 이루게 하니, 상천(上天)의 일은 비록 찾을 수 있는 소리와 냄새가 없더라도 일상생활에는 사도(斯道)가 유행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부자(夫子)와 같은 성인이라도 오직 요 임금과 순 임금을 계승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본받는다고 말할 따름입니다. 지금 신들이 우리 전하를 우러러 받들고 우리 전하를 우러러 믿는 것은 바로 요순문무(堯舜文武)의 도이니, 군사(君師)의 책임은 전하의 겸손한 덕으로도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88일에 내리신,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을 읽고서 머리를 맞대고 격앙하여 삼가 스스로 당우(唐虞삼대(三代)의 후대에 태어나 당우·삼대의 성세를 다시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 선정신 김인후(金麟厚)의 조예의 깊이에 대해 신들이 이전에 올린 상소에서 논한 것은 오히려 만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내린 250자 비지(批旨)는 글자마다 참되고 진실하며 구절마다 정밀하고 은미하여 선대의 유학자들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을 전하께서 드러내셨고, 공사(公私)의 전적(典籍)에서 미처 밝히지 못한 것을 전하께서 밝히셨습니다. 먼저 성리(性理)를 천명하여 처음으로 큰 근원을 보았다는 것은 바로 도기위미설(道器危微說)이었습니다.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 것은 바로 참된 식견과 기상이었습니다. 사문(斯文)에 공이 있고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은 바로 안과 밖을 모두 닦은 지취이고, 이욕(理慾)을 조그만 차이에서 분변한 것입니다.

또 신들이 더욱 감발하고 흥기함을 그치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크나큰 공적과 은혜라고 하신 말씀은 오직 전하께서 스스로 터득하신 것이고 전하께서 마음으로 이해하신 것입니다. 이 비답을 듣고도 흥기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인간의 본성이 사라진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비답을 내리신 뒤에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편지를 보냈고, 또 대사성 윤득부(尹得孚)가 좨주(祭酒) 송환기(宋煥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성인의 마음을 독실하게 믿어 사문(斯文) 일통(一統)의 의리를 천명하고자 하였고, 한편으로 이단이 종식되지 오도(吾道)가 밝아지지 못함을 근심하여 홍수와 맹수의 화()를 막고자 하였으니, 정성이 또한 지극하고 심정은 또한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어려서 효경(孝經)을 배운 때로부터 지금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인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고 거경(居敬)의 공부를 독실하게 하며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났으니 마치 강하의 둑이 터져 물이 세차게 밀려든 듯이 하여 막을 수 없었습니다.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구분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성쇠의 기틀에서 반드시 진위를 살펴서 온축하여서는 본원의 묘리를 함양하고 발현하여서는 천지의 큰 도를 두루 경륜하였으니, 그 성대한 덕과 신령한 공력은 좁은 소견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 삼아 상설(霜雪)과 우로(雨露) 같은 가르침을 정령(政令)을 베푸는 사이에서 징험해 보소서. 그리하신다면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바로 전하에게 하나의 굉대(宏大)한 강목이고, 문정공(文靖公)을 추모하는 마음을 일으켜 분명한 유지(諭旨)로 몽매한 이들을 깨우치는 것은 성학(聖學)을 우러를 수 있는 일 중의 한 가지 일 것입니다.

두 대신이 문답한 것과 한 유현(儒賢)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한결같은 말로 흠송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지금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두 손을 마주 잡고 발돋움하며 성대한 의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요사스러운 무리가 안으로는 간사한 짓을 하려는 마음을 품고 밖으로는 영합한다는 말을 창도하여 함부로 입을 놀려 듣는 사람들을 현혹하려고 합니다. ,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십수 년 이래로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세도(世道)를 어지럽히는 일에 대해서 그동안 대간의 상소가 승정원에 올라왔고, 지금 이 대사성의 글이 사림에까지 미쳤습니다. 변론하여 이단을 시원히 물리치는 공에 대해서는 소중한 한마디 말을 유현에게 매우 바라거니와 일종의 음란하고 사특한 의론에 대해서는 명철한 성상께 분명하게 아뢰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그 정상을 다 아실 수 있겠습니까.

대개 간사한 소인배들은 참소하고 아첨하는 습속만 알아 엿보는 것을 재주로 여기고 선류(善流)를 원수처럼 대합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도모하는 것은 오직 속이고 가리는 술수에 있으며, 밝음을 등지고 어둠을 향하여 몰래 원망하는 말을 지껄이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을 누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조마경(照魔鏡) 같은 천감(天監)이 높은 곳에서 굽어봄에 미쳐선 마치 살 곳을 잃은 도깨비가 의탁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출몰하면서 기막힌 계책을 내는 것처럼 하여 마침내 사문(斯文)의 큰 의론을 가지고 성상의 뜻에 영합한다고 하였습니다. 소인이 정도를 배반하는 논의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을 영합한다고 하니, 지식이 적고 견문이 좁은 신들이지만 실로 전에 들어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순(堯舜삼대(三代) 때에는 사도(師道)가 위에 있어 예악과 정책이 천자에게서 나오거늘 경연에서 찬동한 것을 모두 영합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반드시 그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의리에 배치된 뒤라야 정도(正道)에 부합한다고 합니다. 이 또한 너무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인지라 도리어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 먼저 소학을 배우고 다음으로 대학을 배우며, <태극도(太極圖)>를 덕성의 본령으로 삼고 <서명(西銘)>을 학문의 기강으로 삼은 것은 선정신이 사람을 가르친 방법입니다. 천지 백성을 마음으로 삼아 오도(吾道)가 흥성하기를 자임한 것은 선정신이 자처하던 도리입니다. 안과 밖, 드러남과 은미함을 한결같이 하되 성()에 근본을 두고, 동정(動靜)과 지행(知行)을 관통하되 경()을 위주로 한 것은 선정신이 자수(自修)하던 방법입니다. 청풍(淸風)과 대절(大節)에 이르러서는 고무시키고 환하게 빛나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를 강해지게 하였으니 이는 선정신의 출처(出處)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고 한 것은 바로 선현이 이미 정한 논의입니다.

, 선정신의 위대한 도덕, 올바른 출처, 사문에 대한 공업, 후학에게 끼친 은덕에 대해 어떤 보답인들 마땅하지 않겠으며 어떤 은전(恩典)이든 불가하겠습니까. 적막한 백여 년에 선정신이 비로소 한 번 천명하였고, 이제 우리 전하를 만나매 그 알려지지 못한 것을 더욱 천명하여 천지간에 드높고 일월을 움직이는 도덕과 광휘가 하루아침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우리 동방 선비들은 모두 연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압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뭇 왕보다 탁월하지 않았다면 또 어찌 한 사람만 들어 표장(表章)하는 분명한 유시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봉조하가 진심을 피력하여 성상의 뜻을 밝힌 까닭이니, 인용한 바 오늘날 사림의 영도자가 주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는 말은 참으로 격언입니다. 사도(師道)가 아래에 있는 것은 사문의 불행입니다. 우리 군주를 임금으로 섬기며, 우리 임금을 스승으로 섬기는 것보다 큰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기꺼이 의리를 저버린 채 대놓고 승부를 겨루고자 하니, 아무리 그들이 함정에 빠트리는 데 급급하더라도 유독 어찌 군사(君師)를 저버려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들은 식견이 얕고 말이 졸렬하지만 실로 말은 반드시 많을 필요가 없고 말하지 않는 것이 적음이 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앞서 신들이 이른바 도가 사람에게 의탁한다는 것은 우리 전하에게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또 사도(斯道)가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은 이것이 관건입니다. 성대한 예가 혹 지체될까 두려워하고 사설(邪說)이 횡행하는 것을 통탄하여 이에 감히 목욕재계하고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분명한 교지를 속히 내리시어 선정신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는 전례를 특별히 거행하여 정학을 보위하고 간악한 싹을 제거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세도에 매우 다행일 것이며 사문에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나라 안팎의 선비들이 문정공을 공자 사당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한 지 오래되었다. 전에 신중을 기했던 것도 뜻하는 바가 있어서였고, 근래에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뜻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대개 몇 건의 큰 의리 중의 하나라고 한 그대들의 상소는 간결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한 것이라 하겠으니, 누가 그대들을 소원한 자들이라고 말하겠는가. 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였으니 감탄스럽고 감탄스럽다. 그러나 막중한 예를 한 장의 상소로 경솔하게 허락하기는 곤란하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에 더욱 힘쓰라.”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광헌(李光憲)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다.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일전에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일에 대해 널리 여론을 모아 한목소리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정성이 부족하고 내용이 보잘것없어 실로 정학(正學)을 창도(昌道)한 김인후의 공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도(師道)를 닦은 성상의 교화를 돕지 못하였기에 머리를 맞대고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손 모아 공손히 기다렸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내리신 비답을 받드니, 한 장의 윤음(綸音)에서 반복하여 온화하게 타이르시되 의리의 정미함을 재제(宰制)하고 전례(典禮)의 중함을 자세히 살펴 마치 얼굴을 마주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 혼미함을 일깨워 주시는 듯하였습니다. 신들은 두 손으로 받들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하여 정신이 아뜩하였으니, 실로 마땅히 물러나 성명(成命)을 기다려야지 다시 번독스럽게 해선 안 됩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대현을 높이는 것은 성절(盛節)이고,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대례(大禮)입니다. 성절로 대례를 거행하여 그것으로써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사습(士習)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바로 오늘이 하나의 큰 기회입니다. 신들은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참람함을 범하는 죄를 피하지 않고 다시 성대한 은전을 속히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스승의 가르침을 속히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되며 세도와 사습을 크게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또 성상께 우러러 아뢰니,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굽어살펴 주소서.

, 김인후의 도학, 문장, 사업, 절의는 우리 전하께서 이미 그 대원(大原)을 환하게 꿰뚫어 보시고 이전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드러내셨으니, 신들은 진실로 망녕되이 다시 얕은 소견을 가지고 다시 보잘것없는 설을 아뢰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시대가 점점 멀어져 백성의 뜻이 쉬이 어두워질까 두려워서 마침내 감히 방책(方策)에서 얻은 것을 한두 가지 다시 아룁니다.

김인후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고 견해가 독보적이어서 스승의 도움 없이 도체(道體)에 묵묵히 계합하여 공자(孔子)와 주자(朱子)가 서로 전한 도통(道統)을 찾고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에서 이미 실추된 사문(斯文)의 도를 드날렸습니다. 안과 밖, 드러남과 은미함을 한결같이 하되 그 근본은 성()이었고, 동정(動靜)과 지행(知行)을 관통하되 위주로 한 것은 경()이었습니다. 도기상하(道器上下)의 분변에 이르러서는 그 지극함에 도달하여 조화의 오묘함을 분석하였고, 이기(理氣)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에 이르러서는 절충하여 성명(性命)의 근본을 꿰뚫었습니다. 정밀하게 쌓은 공으로 광대하고 고명한 경지에 이르러, 그 광채가 밖으로 발산되어 윤택하고 가득 넘쳐 안팎이 깨끗하여 천연스럽게 기수(沂水)와 정취(庭翠)의 기상이 있는 것이 김인후의 도학입니다.

많이 쌓고 널리 발휘하여 드러내어 문장을 지었으니, 논어(論語)에서 범위를 갖추고 대학(大學)에서 규모를 세워 상서(尙書)의 광대하고 엄정한 문체로 맹자(孟子)의 기상이 뛰어난 음률을 본받아 고정(考亭 주희(朱熹))에서 의의를 찾고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에서 윤택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조예의 깊음은 옛 성인이 온축한 것을 드러내고 문장의 오묘함은 사물의 정을 다하였으니, 정밀한 뜻이 드러나 한 번 경()이 되고 한 번 위()가 되었습니다. 시에 있어서는 시경에 근본하고 이소경(離騷經)문선(文選)을 참고하여 즐거워하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근심하면서도 상심하지 않았으니, 성령(性靈)을 다스리고 도덕을 함양하여 교묘(郊廟)에 올려 귀신과 사람을 함께 조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김인후의 문장입니다.

천지간에 자양(紫陽 주희(朱熹))이 있는 것을 알아 이미 어두워진 데서 정학(正學)을 높이는 경우에는 반드시 자양을 믿었고, 실추하려는 데에서 남은 실마리를 찾는 경우에는 반드시 자양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위로 공자의 정맥(正脈)을 이어 사문(斯文) 대일통(大一統)의 의리가 우리 동방에서 다시 밝아지게 하였으니, 비록 말학 후생이라도 자양의 글을 외고 자양을 따를 줄 알아서 자양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천고에 서로 계승한 심법과 학술이 더 이상 다른 학술들에 의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김인후의 힘이니, 비록 그 이로움과 혜택을 당대에 규명하지 못하더라도 옛 성현의 뒤를 잇고 후학의 길을 열어 주는 학문의 공로가 과연 자양 아래에 있지 않은 것은 김인후의 사공(事功)입니다.

영허(盈虛)와 소장(消長)의 이치를 살피고, 즐거우면 행하고 걱정되면 떠나는 성()을 밝혔으니, 기미를 아는 것이 신묘하여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었습니다. 산중에서 저녁까지 곡하여 남모르는 고통이 더욱 깊었고 시편에 뜻을 깃들인 작품은 고심하되 후회가 없었습니다. 곧아서 자취를 보이지 않았고 미약하여도 절개를 온전히 지켜 끝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완인(完人)이 되고 효릉(孝陵 인종(仁宗))의 순신(純臣 진실한 충신)이 되었습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이른바 한마음으로 삼재 조화(三才造化)의 묘리(妙理)를 함축하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萬世綱常)의 중책을 맡았다.’라고 한 것은 김인후의 절의입니다.

, 지금 김인후의 어짊으로 문묘에 추배(追配)하자는 것은 공론이 있으니, 백세토록 징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김인후가 태어나서는 덕을 숨기고 광채를 감추었고 죽어서는 세대가 멀어지고 말이 사라져, 선비들은 드러내는 일이 없고 사람들은 임무로 삼지 않아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으니, 200년 동안 겨를이 없어 거행하지 못한 전례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요순(堯舜), 문무(文武) 같은 성인으로 요순, 문무의 지위에 올라 팔도를 다스리는 군주가 되고 만세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군강(君綱)을 세우는 경우에는 곤월(衮鉞) 아래에서 선악을 분별하고 사교(師敎)를 행하는 경우에는 함장(函丈)의 사이에서 세상을 보니, 말을 하면 천하의 법이 되고 행하면 천하의 법칙이 됩니다.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연원을 접하고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집대성하여 일이 오도(吾道)와 사문(斯文)에 관계되면 오묘한 뜻을 분석하고 몽매한 사람을 인도하여 온 세상에 덕화를 폈습니다.

세 선정신을 함께 배향하기를 청하자 성상께서는 먼저 김인후를 거론하고 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 간곡하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무릇 오늘날 우리 전하를 군주로 섬기고 우리 전하를 스승으로 섬기는 자들이 모두 몽매함을 제거하고 꿈에서 각성한 듯하며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보는 듯하였으니, 누구인들 대성인의 대중지정(大中至正)한 견해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비록 매우 어리석지만 이 하교를 받들고서 사시(四時)처럼 믿고 시초(蓍草)와 귀갑(龜甲)처럼 받들어 성대한 예식을 거행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을 공손히 기다렸지만 명이 여전히 내리지 않았고, 어제 또 대궐에 호소하였으나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 김인후의 어짊은 신들이 다 알 수 없지만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한 사람만 들어 배향하는 의론은 신들이 미처 먼저 꺼내지 못했지만 전하께서 이미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배향하는 예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렇게 거행하지 않으시니, 신들의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세도를 안정시키고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는 일은 실로 하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거니와, 세도를 안정시키고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을 방도는 실로 문묘에 배향하는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오늘날 사대부의 명의(名義)과 풍절(風節)이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여지없이 무너져서 시끄럽게 공격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사설(邪說)이 멋대로 행해져 거의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문정공(文靖公) 한 사람만 들어 배향하라고 하신 하교는 정미함을 드러내고 전례(典禮)를 참작한 것이니, 천지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모종의 상반된 의론이 의관을 갖춘 유자(儒者)의 반열에서 마구 일어나 심지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의리를 영합한다는 죄과로 돌리기까지 하여 반드시 승부를 겨루어 좌절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합니다. , 세도가 함닉(䧟溺)되고 사습(士習)이 어그러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식자들의 우려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지금 밝히고 억제하는 도리에 있어서 더욱 조금이라도 혹 지체해선 안 됩니다. 이것이 신들이 이른바 속히 대례(大禮)를 거행하는 것이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로잡는 하나의 큰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는 은전을 속히 거행하게 하시어, 사설(邪說)이 절로 그치고 정론(正論)이 크게 행해져 위로 성상의 성덕(盛德)을 밝히고 아래로 사문의 대통을 바로잡게 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은 이전 비답에서 언급하였다. 그대들은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준원(洪準源)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높은 하늘과 낮은 땅 가운데 사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저 사람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서서 삼재(三才)가 된 것은 인의(仁義)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를 세운 것은 인과 의이다.’라고 하니, ()은 부자 관계에 중요한 것이고 의()는 군신 관계에 주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근본이고 사람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이 됩니다. 이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고 이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교라는 것은 반드시 군사(君師)에게서 나오고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그 교화를 돕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사시(四時)가 운행함에 바람과 우레와 비와 이슬이 있어 조화(造化)의 묘용을 펴지만 그 기틀은 실로 하늘에 통합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즉 황제(黃帝), 요순(堯舜), 삼왕(三王)과 같은 성인이 모두 이 도를 가지고 하늘을 이어 법칙을 세워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어 천하 만세에 가르침을 남긴 것입니다. 이로써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여 삼강(三綱)이 확립되고 오상(五常)이 펴졌으니, 그 가르침은 한결같아서 도를 헤아려 대일통(大一統)의 의리가 있으니, 사도(斯道)가 큽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총명함으로 임하고 정일집중(精一執中)하시어 천인(天人)의 오묘함을 깊이 궁구하고 성명(性命)의 근원을 환히 살피셨습니다. 육경(六經)에서 은미한 뜻을 드러내어 옛 성인이 드러내지 못한 것을 확충하시고 뭇사람의 말을 절충하여 여러 유학자의 장점을 집대성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곧바로 수사(洙泗 공자)의 도통을 잇고 낙민(洛閩 정자(程子)과 주자(朱子))의 근원을 크게 여셨으니, 삼대(三代) 이후로 사도(師道)가 위에 있는 것을 다행히 오늘날에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무릇 진유(眞儒)를 높이고 장려하며 정학(正學)을 부지하는 일에 항상 정성을 기울여 뜻을 지극히 하셨습니다. 학문과 덕업(德業)을 헤아리고 의문(儀文)과 전례(典禮)의 사이에서 재제(裁制)하는 것이 모두 자연의 권도(權度)에 있어서 금과 옥으로 만든 저울과 자처럼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어긋남이 없으십니다. 지난번에 성상께서 선정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추모하는 마음이 있으셨으니, 대저 김인후가 깨달은 도는 바로 전하께서 행하시는 도입니다. 전하께서는 황제, 요순, 삼왕의 도를 마음에 보존하고 나라에 행하시되 장차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 해와 달처럼 환히 빛나고 만물을 격동하여 삼재(三才 천지인(天地人))의 한 근원 가운데에 표준을 세우고자 하셨으니, 김인후가 아는 바와 강론한 바는 이 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성상의 마음에 깊이 계합하여 군신간에 성대하게 만나 수백 년 사이에 융화되어 간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 문정공은 도학(道學), 절의(節義), 문장(文章) 세 가지를 모두 겸비하였으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밀한 조예를 지녀 실천하였으니, 선대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그에 대해 논술한 것이 갖추어져 있으며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였습니다. 신들은 두 통의 상소를 올려 낱낱이 열거하며 환하게 아뢰었고, 또한 봉조하 김종수(金鍾秀)의 편지에서 인용한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의 말에 더 보탤 수 없을 만큼 자세합니다. ‘맑은 물의 연꽃[淸水芙蓉]이요, 맑은 바람에 갠 달[光風霽月]’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출처의 올바름과 경학(經學)의 정밀함을 말한 것이니, 각각 그 하나의 단서에 나아가 전체의 묘용을 유추한 것일 따름입니다. 신들이 또 어찌 성상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총괄하여 논하자면 도가 아래에 있는 것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자(顔子)와 증자(曾子)를 지나 자사(子思), 맹자(孟子)가 있으니, 자사와 맹자의 도를 얻어 주자(周子)와 정자(程子)가 되었으며, 주자와 정자를 배워 자양(紫陽) 주자(朱子)가 송()나라의 천하에 그 도를 통괄하였는데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학문이 성행하여 그 정도를 잃음으로부터 도가 마침내 우리 동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방에 있으면서 사문(斯文)을 크게 천명하고 그 종통(宗統)을 잘 이어받은 자에 대해서는 모두 융숭하게 보답하여 제향을 올리고 문묘(文廟)에 배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저 김인후는 홀로 대의를 보고 곧장 정맥(正脈)을 찾아 깊이 나아가고 두터이 쌓아 정밀하고 정대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마음으로 삼재 조화(三才造化)의 묘리를 함축하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萬世綱常)의 막중함을 자임하였습니다. 이에 부자와 군신이 각각 그 바름을 얻고 천륜과 인륜이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났으니, 그 덕과 그 공으로 우뚝이 백세의 스승이 된 자를 문묘에 배향된 현인의 반열에 올려 제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의 성학(聖學)으로 이를 알고 계신 지 오래되고 느낀 것이 깊으실 것입니다. 어찌 후생 말학(後生末學)이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면서 호소해 마지않기를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윤허하지 않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신들은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참으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성인이 이미 일어나 사도(師道)가 밝아졌지만 유독 시속의 의론은 바야흐로 가라앉아 드러나지 않고 인심은 이미 고질이 되어 치유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츰 대도와 배치되고 공의와 맞서 싸워서 스스로 소인과 음사(陰邪)의 무리로 전락하는 것을 달가워하여,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어 엄숙한 것에 대해서도 사물이 감당하지 못하고, 우주에 유행하는 대자연의 이치가 드러나더라도 사람이 교화되지 못하니, 신들은 천하에 이런 이치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인의를 군신과 부자의 법칙으로 삼고 예악을 우주에 유행하는 대자연의 작용으로 삼아 인도하고 단속하고 고무하여 이 가르침을 한 시대에 행하신다면 그 일은 문묘를 열어서 대유(大儒)를 제향하는 문제에 대해 의론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정론(正論)을 드러내고 사설(邪說)을 억제하며, 사륜(絲綸)을 너그럽게 드러내고 우주를 청명하게 넓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어리석더라도 오히려 삼고(三古)의 반열에 성덕(聖德)을 높이 올려 놓고 먼 후대에까지 성덕(聖德)을 밝혀 덕을 높이고 어진 이를 본받는 때 남긴 교화를 펴고자 합니다.

, 역대 아직 강론하지 못한 의리를 드러내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한 부의 역사책에 기록하여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유현을 성균관 문묘의 배향하는 반열에 올리는 일을 묵묵히 허락하는 것은 또한 이 몇 건의 대의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들이 성상의 덕을 높이고 성상의 뜻을 밝히는 것으로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으며, 세도와 인심이 사라지고 변하는 기틀로 어찌 또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는 전례를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정도를 지킴으로써 사문의 대통(大統)을 안정시키고, 대의를 부지함으로써 백성에게 인륜이 있음을 밝히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선정신 문정공(文靖公)은 바로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이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를 먼저 공자 사당에 종사(宗祀)하면서 주자(周子)만 홀로 종사하는 반열에서 빠뜨린다면 이정(二程), 장재, 주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그대들이 오늘 청하는 것은 바로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마음이다. 윤허를 오늘날까지 짐짓 미루어 온 뜻은 그 예를 중하게 여기고 그 일을 신중히 하려는 데에 있었을 뿐이다. 소가 이미 세 번이나 올라온 이상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를 문선왕(文宣王)의 사당에 배향하자는 그대들의 청을 시행하도록 윤허한다.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조사한 뒤에 날짜를 정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를 더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또 부조지전(不祧之典)를 명하였다.

겨울 10월에 다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道德博文]’을 문()이라 하고 정도로 남을 승복시킨 것[以正服人]’을 정()이라 한다.

 

11월 상이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이달 기유(己酉)에 문묘에 배향하였다.

159(1802)-금상(순종) 2- 임술년 여름 5월에 문집을 중간(重刊)하였다.

이보다 먼저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에 문집을 간행하였고, 숙종(肅宗) 병인년(1686, 숙종12)에 중간하였다. 정조 병진년(1796, 정조20)에 문묘에 올려 배향된 뒤에 상이 연석에서 유집(遺集)을 중간하라는 하교가 있었고, 지금에 이르러 간역(刊役)이 이루어졌다.

 

연보 발(年譜跋)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 연보 초본(草本)이 선생의 후손에게서 처음 완성되어 일가의 건연(巾衍)에 갈무리해 두었다. 지난날 정묘(正廟) 병진년(1796, 정조20)에 유생들이 상소하여 청한 일로 인하여 상께서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특별히 명하고 이어서 유집(遺集)을 개간(改刊)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저(當宁) 임술년(1802, 손조2)에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함께 모의하여 간행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속히 연보의 초고를 가져다 장차 모두 이를 판각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 강령과 조목, 의례(義例)가 자못 번잡하였으므로 제공(諸公)이 나에게 다시 더 윤색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초본을 가져다 바로잡아 편집하기를 아래와 같이 한다.

대저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0여 년이 되었으니, 그 언의(言議)과 사적(事跡)은 실로 이미 아득하여 징험하기 어렵다는 탄식이 있다. 더구나 후손이 중간에 몰락하여 문헌이 부족하고, 전송(傳誦)하고 서술한 나머지에서 근근이 수습한 것이 단지 이것뿐이니, 어찌 매우 안타까워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은 바로 의리의 정미한 것으로, 고봉(高峯)의 논은 실로 선생의 설을 조술(祖述)한 것이니, 선생이 도에 나아간 실상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출처와 행장(行藏)은 바로 성현의 대용(大用)으로, 선생이 갑()과 을() 사이에서 대개 기미를 아는 신묘함이 있으니, 그 정의(精義)의 용()을 또한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다. 옛말에 이르기를 깃털 하나에서 봉황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이것은 선생이 도에 나아간 정밀한 의리의 큰 단서와 관련된 것임에랴. 비록 여기에서 전체를 시원하게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거듭 감회가 있다. 선생의 학문과 도덕의 훌륭함은 처음에는 대개 숨겨져 드러나지 않다가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이 묘도(墓道) 문자에서 칭술한 연후에 마침내 드러내어 분명하게 밝혔다. 근세에 이르러 유생들이 현인을 문묘에 배양하자는 논의를 발명하였지만 도리어 선생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우리 정묘(正廟)께서 특별히 선생의 일을 제기하여 그 단서를 열어 끝내 공론이 모아져 큰 의전(儀典)이 거행될 수 있었다. 드러나고 묻혀 짐에 때가 있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이치이지만 만약 고금을 뛰어넘는 우리 정묘의 성학(聖學)이 아니었다면 그 융성한 보답이 실제에 부합하는 것이 어찌 이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군신간에 세상에 드문 만남이 아, 성대하도다. 후세에 옛사람의 일을 평론하는 자가 오직 도에 나아간 정밀한 의리의 큰 단서를 가지고 드러나고 묻히는 자취를 규명할 경우, 선생을 살펴보면 아마 거의 가까울 것이다. 또 생각건대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다.[天地中間有二人]”라는 시구는 바로 정자(程子)천고에 아무도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하였다.”라는 말에 해당하니, 선생의 식견과 조예를 이 시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을 버리고 선생을 아는 것은 또한 지엽적인 것이다. 이 또한 후학들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임술년(1802, 순조2) 월 일에 후학 월성(月城) 김일주(金日柱)는 공경히 발문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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