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방-5
⑩ 삼엄(三嚴)
[해설]임금이 正殿에 出御할 때나 거둥할 때에 엄숙한 威儀를 보이고, 백관과 侍衛軍士가 제자리에 모여서 대기하도록 宮中의 큰 북을 치는 것을 ‘嚴鼓’라고 한다. 이때 첫 번째 치는 것을 ‘初嚴’, 두 번째 치는 것을 ‘二嚴’, 세 번째 치는 것을 ‘三嚴’이라 한다. 초엄에 信地에 모이고 이엄에 모든 준비를 갖추며 삼엄에 임금이 정전에 臨御하거나 行陣을 하게 된다. 삼엄에 대한 시각은 대개 하루 전에 아뢰고 재결을 받는다.
時는 기본적으로 하루를 12등분하여 地支의 순서대로 명명하는데 각 시는 다시 기점을 3으로 나누어 初․正․末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각 시를 15분씩 8등분하고 이를 1刻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子時는 현재 시간 기준으로 11시에서 1시 사이를 말하는데, 첫 기점인 11시를 子初라고 하고 12시를 子正, 1시를 子末이라고 한다. 자말은 丑初가 되기도 한다. 다시 이를 세분하여 자초 2각이라 하면 11시 30분이 되는 것이다.
[참고]㉠궁궐을 나가는 시각은 하루 전에 -행행(幸行)은 이틀 전에 한다.- 초엄(初嚴), 2엄(二嚴), 3엄(三嚴)을 2각(二刻)으로 간격을 두어 -환궁(還宮)과 조하(朝賀), 서계(誓戒)는 간각(間刻)이 없고 그 밖의 다른 전좌(殿座)는 정시(正時)로만 한다.- 마련한다.[出宮時刻, 前一日【幸行則前二日】, 初、二、三嚴, 間二刻【還宮與朝賀、誓戒無間刻, 而外他殿座, 只正時。】磨鍊。]《銀臺條例․禮攷․動駕》
㉡궁궐을 나갈 때 초엄, 2엄, 3엄에는 각각 북을 3번 치고, 3엄 뒤에는 또 궁문의 종을 49번 치는데, 종소리가 그치고 나서 외판(外辦)을 아뢴다. -조하(朝賀), 서계(誓戒)도 같다.-[出宮時, 初、二、三嚴各打鼓三聲, 三嚴後, 又打宮門鍾四十九聲, 鍾聲止, 入外辦。【朝賀、誓戒同。】]《銀臺條例․禮攷․動駕》
㉢엄고는, 초엄에는 백관은 門外의 지정된 자리에 나아가고 시위하는 장사 역시 각자 정해진 위치에 정렬하고 갑사는 각문을 把守한다. -정문은 훈련도감의 갑사 12인, 그 좌협문은 금위영의 갑사 12인, 우협문은 어영청의 갑사 12인, 光範門과 崇範門은 훈련도감의 갑사 각 8인이 把守한다.- 이엄에는 백관은 전정에 입장하여 자리에 나아가고 -문관은 좌측, 무관은 우측- 三嚴에는 국왕이 정전에 거둥하고 시위는 班次圖에 규정된 대로 정렬한다.[嚴鼓: 初嚴, 百官就外位, 侍衛將士列立信地, 甲士把守各門。【正門, 訓局甲士十二人; 左挾門, 禁衛甲士十二人; 右挾門, 御營甲士十二人; 光範門、崇範門, 訓局甲士各八人。】 二嚴, 百官入殿庭就位。【東班就左, 西班就右。】 三嚴, 大駕御正殿, 侍衛依班次圖。]《大典會通․兵典․嚴鼓》
㉣국왕이 거둥할 때에는 수가하는 군병은, 초엄에는 정해진 위치에 집합하여 대기하고 이엄에는 진을 치고 삼엄에는 행군한다.[動駕時, 初嚴, 隨駕軍兵聚待信地; 二嚴結陣; 三嚴行陣。]《大典會通․兵典․嚴鼓》
擧動時大駕出宮初嚴, 卯初一刻; 二嚴, 卯正初刻; 三嚴, 卯正三刻, 改啓下。
거둥할 때 대가가 출궁할 때의 초엄은 묘초 1각, 이엄은 묘정 초각, 삼엄은 묘정 3각으로 다시 계하하였다.
戊午正月初七日巳時, 上幸社壇擧動時, 行都承旨金有慶、左承旨李日躋、右承旨趙漢緯、左副承旨李宗白、右副承旨兪健基、同副承旨李喆輔、記事官金始煒、假注書李永福、記注官金道元、記事官李宗迪隨駕。 上乘輿以出。 繖扇、侍衛如常儀。
무오년(1738, 영조14) 1월 7일 사시(巳時)에 상이 사단(社壇)에 행행하러 거둥할 때, 행 도승지 김유경, 좌승지 이일제, 우승지 조한위, 좌부승지 이종백, 우부승지 유건기, 동부승지 이철보, 기사관 김시위, 가주서 이영복, 기주관 김도원, 기사관 이종적이 수가하였다. 상이 여를 타고 나왔다. 산선과 시위는 보통 의식과 같았다.
[해설]‘산선’과 ‘시위’는 산선(繖扇), 일산(日傘) 등의 의장(儀仗)을 갖추는 일과 신하들의 시위를 의미한다.
乙巳正月初十日丑時, 上親行春享大祭于敬昭殿時, 左承旨金啓煥、右承旨鄭錫三、右副承旨尹鳳朝、同副承旨蔡彭胤、注書李壽益、假注書沈游義、記注官權萬斗、記事官李喆輔及兵曹摠府繖扇、侍衛。
을사년(1725, 영조1) 1월 10일 축시에 상이 친히 경소전에서 춘향대제를 행하는 자리에 좌승지 김계환, 우승지 정석삼, 우부승지 윤봉조, 동부승지 채팽윤, 주서 이수익, 가주서 심유의, 기주관 권만두, 기사관 이철보 및 병조와 도총부의 산선과 시위가 입시하였다.
[해설]‘繖扇侍衛’는 ‘繖扇’과 ‘侍衛’ 두 가지로 파악된다. 상이 행행하거나 거둥할 때 참석한 신하들의 명단 뒤에 동사가 없을 경우, ‘侍衛’ ‘隨駕’ ‘入侍’ 등의 동사를 보충하여 번역한다.
⑪ 출궁(出宮)․환궁(還宮) 때의 결진(結陣)
[해설]출․환궁시에는 결진을 하게 되는데 삼엄 중 2엄에 하게 된다.
[참고]수궁 종사관이 주간 순찰, 야간 순찰, 유도하여 각영에서 진을 치는 일, 등을 다는 일, 조두를 치는 일, 등을 내리는 일, 조두를 그치는 일을 차례로 입품한다.[守宮從事官, 晝巡、夜巡、留都各營結陣、懸燈、起刁斗、落燈、止刁斗次第入稟。]《銀臺條例․兵攷․幸行》
又以扈衛廳別將以留都領敦寧府事意之言啓曰: “臣承命留都, 一依啓下事目率領扈衛三廳軍官, 大駕出還宮時, 結陣於備邊司前路, 晝則移陣於敦化門外扈衛之意, 敢啓。” 傳曰: “知道。”
또 호위청 별장이 전하는 유도(留都)하는 영돈녕부사의 뜻으로 아뢰기를,
“신이 유도하라는 명을 받아 한결같이 계하받은 사목대로 호위삼청의 군관을 거느리고 대가가 출궁하고 환궁할 때는 비변사 앞길에서 진(陣)을 치고 낮에는 돈화문 밖으로 진을 옮겨 호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참고]‘호위삼청’은 호위청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원래 인조반정 당시 私募兵을 관군화하면서 생겨난 호위청은 말 그대로 임금의 호위를 담당하였는데 삼청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정조 원년에 1청으로 줄이고 인원도 대폭 감축하였다.
鄭俊一以扈衛廳別將以留都大臣行判中樞府事金興慶意啓曰: “臣承命留都, 一依啓下事目率領扈衛三廳軍官, 今日申時結陣於金虎門、曜金門外, 至大報壇前路, 排列扈衛之意, 敢啓。” 傳曰: “知道。”
정준일이 호위청 별장이 전하는 유도 대신 행 판중추부사 김흥경의 뜻으로 아뢰기를,
“신이 유도하라는 명을 받아 한결같이 계하받은 사목대로 호위삼청의 군관을 거느리고 오늘 신시에는 금호문과 요금문 밖에서 진(陣)을 치고 대보단 앞길에 이르러 배열(排列)하여 호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